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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들

벙커1 특강. 파토의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by 다리디리다라두 2023. 2. 28.

벙커1 특강

파토의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80년대의 한국사회의 일원으로서 청소년의 삶은 고단했다.

이유는 전근대성에서 오는 염증. 
필자가 캐나다, 유럽 유학 시절에서 느낀 외국의 정서.

행복 그 자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느낄 수 있었던 현실
"양식화된 배려"에 가려진 인종차별, 역시 전근대성의 벽이었다.

이런 삶의 단상이 책을 쓰게 만든 배경이 되었다.

 

고등학교 역사교육의 문제점. - 얻을 게 없다.

이런 와중에 접하게 된 책 SF소설 "화재감시원"- 코니윌리스.
1940년의 런던의 St.Paul 대성당의 화재감시원으로 워프해서

화재감시원들 사이에 생기는 알력과 우여곡절을 겪고
다시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와서 본 시험문제.
"사람은 없고 숫자만 있고, 이름만 남았다." 주인공은 허탈함을 느꼈다.
- 사람이 없는 역사는 쓰레기다. 경험하지 못하는 역사는 구구단이다.

 

역사를 알고 싶다면 "개인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자세"로 받아들여라.

 

인류문명은 왜 존재하는것인가?

무엇에 존재의 의미가 있는가?
문명이라는 단어에 함의되어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문명이 바람직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쓰여지고자 한다면,

인류가 추구하는 것도 바람직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문명도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필자가 생각하는 인류, 문명의 존재의 목적이자 의미는 인간의 "독립"이다.
신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본능을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지만,

신이나 자연 본능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바라보라는 것은 아니다.

"부모로부터 독립"이라는 말에 부모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점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만물의 영장인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이유는 단 하나 "힘이 세다"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우월하다는 것인가?.

우리가 우월한 것은 오로지 힘뿐이다. 즉 다른 생물의 목숨을 어렵지 않게 뺏을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패권주의와 연결되며 얼마전까지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정신이었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문명은 이런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이유는 인간이 다른 생물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외수.

우리는 신을 사랑할수도, 자연을 사랑할 수도, 우리의 본능을 사랑할 수도 있다.

공존해야하지만 이에 불필요할 정도로 의지해서는 안된다.

 

고등생물의 정의,

한 자연과학자의 말에 따르면 "수학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그 정의를 규정할 수 있다고 한다.
수학이라는 학문적 범위와 이해능력의 한계에 따라 모호한 기준이 될 수는 있지만, 일면 타당한 점도 있다.
SETI는 이런 근거로 50년째 소수의 배열을 파동에 담아 지구밖으로 송출하고 있다.

 

하지만,

문과적 입장에서 얘기해 보자면,
공감력이 존재하고 조직화되고 제도화되야 고등생물이고 고등문명이다.
공감력이란 "대다수의 사람이 전반적으로 느끼는 공통분모적 감정을 느끼는 능력."을 의미한다.
공감력이 적을 수록 사이코패스에 가까우며 실제로 우리 사회에 100명중에 1-2명은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교육과 소통으로 그 성정이 희석될 수 있긴 하지만,

극단적인 순간에 표출되고, 표출되는 경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공감력이 존재하면 고등생물이고

그것이 조직화되면 바람직한 사회조직이 되고  완전히 제도화된 사회는

이른바 "근대화된 사회"라 할 수 있다.

근대화된 사회일수록 가장 행복한 사람과 가장 불행한 사람의 차가 적어진다.
그리고, 권력은 오로지 공감력의 실현을 위해서만 존재의 의의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야만적인 상태에서 살면 되지만,

그런 삶을 살면서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몽매한 것이며,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표방하는 것은 부끄러운일이다.

이것은 맹자가 말한 본성중의 하나인 수오지심에 어긋나며 결국은 인간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근대라는 개념은 시대적인 관점보다는 정신이며 세계관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현대라는 함정의 단어에 빠져, 근대를 넘어섰다는 착각 속에서 살지만,
사실, 인류 역사상 "자유,평등,박애"가 만족스러울 정도로 실현된 적은 단 한번도 없으며,
도달가능성을 논하기 전에 너무나 소원하다는 것을 직시하고 멀리 떨어져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유럽사는 왜 중요한가?
우리 역사이기때문이다.

청바지나 양복을 더 많이 입고 햄버거와 피자를 즐기고, 바하나 재즈를 들으면서 한국사만 우리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곤란하다.
서구문명은 결국 우리의 문명이 되었음을 인정해야한다.

우리가 말하는 근대정신의 기초도 유럽철학에 근거하고 있다. (동학운동에서 굳이 찾을수는 있겠지만) 

철저하게 지배받는 계급만이 일으킨 혁명은 없다.
역사는 절대로 저절로 굴러가지 않는다.
헤겔이나 막스처럼 운명적인 합목적성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인류는 발전하지 않을 수 있다.
시스템이 망가져 퇴보할 수도, 핵무기 버튼하나로 소멸할 수도 있다.
인류가 멸망한다면 지구가 멸망하는 것인가? 착각이다.
퇴보한 인류를 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세는 그리스.로마시대보다 퇴보한 사회라는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
유럽에는 아직도 그리스.로마시대의 도로를 쓰고 있다. 중세에는 이런 것들이 만들어진 적이 없다.

도로는 소통의 의미이다. 중세는 신의 도그마에 빠진 폐쇄사회였다.
중세에는 사람을 위한 상하수도 시설이 없었으나.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있었다. 베르사이유궁전에도 화장실은 없었다.
신분제도나 의사결정구조도 긍휼제도,지식.기술조차도 중세보다 그리스로마가 우월했다.
(고대의 에레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계산했다. 2천년 후에 콜럼부스가 지구가 둥글다는 설득은 어디에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세는란 기독교의 도그마에 스스로 얽매여서 2천년 전의 과학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뒷걸음쳤던 것이다.)

르네상스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로마로 복귀함으로서 그시대로부터 재출발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인간성 회복이라는 어원적 근거가 가능했던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신에 얽매이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무신론적 합리주의도(도킨스나 마술사 랜디같은) 문제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너무나 잘 속고, 몽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킨스가 이렇게 까지 말하는 것은 좀 정나미가 떨어진다.

"삶으로만 만족하자.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 죽음까지도 가지려 하는가?" 일견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인류가 너무나 많고, 많은 인류가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산다. 이것은 곤란하다.

무엇을 절대적으로 양분하려고 하면 위험에 빠진다. 일도양단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은 도그마에 빠질 우려가 있다.

 

레미제라블,
마지막 장면의 봉기는 1832년 6월에 실제로 있었던 학생봉기사건이다.
1889년 대혁명에 비하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은 아니었지만,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비극은 아니고 의미는 충분했다.

이러한 시도로 인해서, 프랑스는 전세계 민주주의의 귀감이 되었고 근대정신의 실현에 있어서 선구적인 국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생존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겠지만, 역사적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반대로 죽음이 더 값질 수 있다.
영국과 일본은 공화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더 부끄러운 역사이다. 그들보다는 우리가 더 근대적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인물에 접근할 때 주의해야할 점.
역사에서 인물은 전형적인 존재로 그려지지만, 어떤 인간도 전형적일 수 없다. 순수악도, 순수선도 있을 수 없다.
어떤 역사의 인물도 순수악으로 순수선으로 접근하지마라, 그렇게 이해하는 순간,

히틀러를 순수악으로 단정하는 순간 우리가 경멸하는 히틀러의 문제점이 우리 스스로의 모습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면, 이주노동자를 학대하는 고용주들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몽매하기때문이다. 전근대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 속의 인물을, 그리고 역사를 우리또는 우리시대와 동일시하는 자세로 이해해야만,

우리는 전근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인류 발전적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고,

발전하는 역사속에 일원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