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나 먹자 - 동지 팥죽과 정월 대보름
일반적으로 봄이 되면 땅을 파거나 나무를 베고 집을 짓고 농지를 정리합니다. 이 때 이유를 알 수 없이 병에 걸리게 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것을 동티라고 합니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몸으로 무리해서 일을 하다 삐끗 허리를 다치고 몸살을 앓게 되는 것일 텐데요, 땅과 나무에 서려있던 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생각 했던 것이죠. 이러한 잡신들이 어디에나 머물러 있는데, 잡귀들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동짓날 밤 팥죽을 뿌려 물러가는 어둠에 태워 보내고 이듬해 새롭게 시작할 집 안팎의 일을 하며 동티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팥은 아무 때나 사용되는 식재료가 아니었습니다. 팥은 어쩌면 지금의 항암치료제이거나 양귀비 씨앗 같은 극약처방일지 모릅니다. 팥을 쓰면 집을 지키는 좋은 귀신들도 쫒아내는 격이 되기 때문에 사람을 지켜야 한다고 여겨졌을 때만 팥을 사용했습니다. 가령 동짓날처럼 잡귀가 많은 날에 팥죽을 해 먹거나 생일날 팥밥을 지어 먹여 죽은 것들의 기운보다 생명을 가진 사람의 기운이 커지길 기원할 때만 사용했습니다. 똥통에 빠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연중 팥을 넣어 만든 음식을 먹는 날은 동지와 생일뿐이었고 간혹 마을에 혼사나 출산, 집들이가 있을 때 팥떡을 얻어먹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 잡귀를 물리쳐야 하는 날이었던 것이죠. 봄날 말입니다.
호박 심은 자리 옆에 구덩이를 파고 똥을 묻고 흙으로 덮어 뒀던 모양입니다. 오만가지 말썽은 다 부리던 제가 그 똥구덩이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겠죠. 사뿐사뿐 걸어가다 밟은 것도 아니고 좋다고 뛰어가다 풍덩 ;;; 발만 빠졌으면 그러려니 하는데 철푸덕 넘어지기까지... ;;;; 아오~ 씨발. 안 빠져 본 사람은 모르는 겁니다. 그거. 차가운 것 같으면서 오묘하게 뜨뜻하고 걸쭉한... 음... 그 질퍽한 느낌. 재빠르게 몸을 빼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느릿느릿 손과 발을 빼내며 느꼈던 열패감... 엄마는 똥 묻은 놈 나무랄 수도 없고 옷 벗겨 씻기고 아랫목에 뉘이더니 팥떡을 해서 먹이더군요. 이유도 모르고 먹었는데 팥떡 먹은 효험이 있었는지 똥독은 오르지 않고 냄새만 한 일주일 가곤 말았습니다. 네;;; 이러한 이유로 동지가 되면 팥죽을 쑤어 먹었는데요,
올해 농사지은 팥입니다. 올해는 태풍도 없었고 비도 많이 오지 않아 모든 농작물에 풍년이 들었는데 팥도 마찬가지로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붉은 팥이 보기 좋지요.
이 팥으로 팥죽을 쑤어보겠습니다.
우선 팥을 한 번 삶아 냅니다. 파르르 끓어오르면 불을 끄고 소쿠리에 받쳐 삶은 물을 버리고 팥을 깨끗이 행궈주세요. 팥 껍질에는 약간의 독성이 있기 때문에 처음 삶은 물은 버리고 새 물을 받아 삶아줘야 합니다. 새 물을 받은 솥에 씻은 팥을 넣고 무르게 삶아 줍니다. 무르게 익은 팥을 소쿠리에 넣고 꾹꾹 눌러 즙을 짜주세요. 껄끄러운 껍질을 걸러내기 위한 작업이니 믹서기에 돌리지 말고 성긴 소쿠리에 놓고 눌러 즙을 짜주는 것이 좋습니다. 국물이 다 짜지면 남은 찌게미는 콩고물로 사용하고 모아진 국물을 솥에 넣고 졸여주세요. 졸이는 중간 중간 잘 저어줘야 늘러 붙지 않습니다. 팥죽을 끓이는데 팥죽이 붉지 않고 보라색이다 하시는 분들 손!! 팥을 너무 아낀 경우입니다. 삶을 팥을 즙만 짜내야 붉은 팥국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믹서기에 갈거나 너무 열심이 짜내면 날곡 안에 든 팥 고물이 국물 안으로 많이들어가게 되고, 탁해진 국물 때문에 안타깝게도 붉은색의 팥국물을 얻을 수 없게 되네요. 국물을 짜내고 남은 팥고물은 떡에 얹어 먹거나 여타 다른 음식의 고명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새알심도 만들어야죠. 새알심은 송편을 만들 때처럼 익반죽을 해주면 됩니다. 쌀은 멥쌀로 사용하는 것이 좋지만 조금 더 쫀득하고 걸죽한 팥죽을 원하면 찹쌀가루를 조금 섞어주는 것도 좋습니다. 뜨거운 물로 익반죽을 해줘야 새알심이 죽에 들어가 풀어지지 않습니다. 송편처럼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죠. 그저 동글동글 손바닥으로 굴려주면 됩니다. 팥국물이 적당히 졸아 들면 새알심을 넣고 끓여주세요. 이 때 소금으로 적당히 간을 해 주고 먹을 때 설탕이나 꿀을 넣어 먹으면 달콤한 팥죽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시원하고 알싸한 동치미를 곁들이면 금상첨화. 먹기 전에 문 앞에 한 대접 떠 놓거나 창틈, 문틈에 팥죽을 바르며 한 해 동안 쌓였던 자신의 찌질함과 진상력을 두터운 어둠에 딸려 보내길 바랍니다. 더불어 이 땅에 드리워진 망령든 대통령의 어둠도 함께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집집마다 청와대를 향해 팥죽 한 그릇 씩 착착 찌클어 주는 것도 당부드립니다. 잡귀야 물러가라. 이상 전국사이비무속인협회에서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며. 끙;;
잡것은 물러가라~~ 동지는 절기에 들어있는 명절입니다.
음력 1월 1일,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은 홀수가 반복되는 흉한 날로 전화위복의 계기를 삼고자 명절로 정한 날입니다. 숫자는 1~9까지가 한 바퀴를 도는 것이므로 11월 11일은 1월 1일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명절로 쳐주지 않고, 극강어둠의 날인 동짓날이 11월 11일 전후로 들어가기 때문에 동지에 11월 11일 보다 더 강력하게 퇴마행위를 하였습니다. 1월 1일은 설날, 3월3일은 삼짇날, 5월5일은 단오, 7월7일은 칠석, 9월 9일은 중앙절입니다. 이 날들은 흥겨운 놀이들을 하거나 몸을 씻는 행사들이 주를 이루는데 불길한 홀수가 반복되는 날을 길일로 바꿔보기 위한 노력들였죠. 그렇다고 동지처럼 퇴마행위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명절 중 퇴마행위를 하는 날은 동지 뿐입니다. 대부분 내 몸을 정갈히 하고 신에게 제를 올리고 달래는 것으로 흉이 들지 않길 ‘부탁’드린 것이었습니다. 명절중 이 부탁을 가장 많이 드리고 다양한 신들을 위로하고 달래는 날은 보름입니다. 1월 15일 정월 대보름(상원), 7월 15일 백중(중원), 8월 15일 추석, 10월 15일 시월보름(하원)에는 다양한 신들에게 감사드리고 노한 신은 달래고 위로하는 날이었습니다.
특히 정월 대보름의 의미는 큽니다. 동짓날 잡귀를 물리치겠다고 팥죽을 뿌려 졸라 씩겁하게 만들지 않았겠습니다. 씨발 것들이 집도 지켜주고 장독대도 지켜주고 우물도 지켜주고 나무도 지켜주고 땅도 지켜줬는데 잡귀들 물리치겠다며 팥죽을 뿌린 것 아니겠습니까. 조까 나몰라라 삐져있는 집안의 신들을 달래 한 해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드리는 날입니다.
설날엔 남자들이 조상신에게 제를 올렸다면 정월대보름에는 여자들이 집안의 다양한 신들에게 제를 올립니다.
정월대보름날 새벽의 풍경은 참으로 몽환적입니다. 제가 잠들어 있던 시간에 할머니, 엄마가 일어나 제를 올렸기 때문인데 설핏 잠이 깨서 지켜봤던 그 장면이 오래토록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모든 제사의 주관은 아빠가 했었는데 그날만큼은 아빠가 보이지 않았지요. 왜 아빠가 없을까... 자고 있는 저를 이불채 끌어다 아랫목으로 옮겨놓고 커다란 상을 펴고 제상을 차리는데 그것도 참 특이했습니다. 제기에 정성스럽게 담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양재기에 여러 가지 나물들을 가득 무쳐 담아 올리고 커다란 솥에 탕을 끓여 올리고 함지박에 오곡밥을 지어 고봉으로 담아 올렸습니다. 술도 없고 국도 없고 초도 없는 상이었는데 조촐하지만 대단히 푸짐해 보였습니다. 고기나 생선이 없는 것도 이상하게 보였죠. 나물냄새, 탕냄새, 오곡밥냄새가 잠이 깨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불 속에서 할머니와 엄마가 하는 양을 지켜봤더니,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모으고 뭐라고 궁시렁 거리며 빕니다. 손바닥을 문질러 가며 뭐라고 뭐라고 빌데요. “할머니. 뭐라고 궁시렁거려?” “응? 아톰이 잘되라고 비는 거셔. 야가 안 자고 깼네. 어서 자.” “아빠는 어딨어?” “아빠는 자지.” “아빠는 왜 제사 안 지내고 자?” “정월 대보름날 새벽이는 여자들이 제사를 지내는 거셔. 세상 만물 신들에게 밥 한 끼 해 맥이고 올 해도 아톰이 아프지 말고 공부도 잘하게 해 달라고 비는 거셔. 응. 어서자” “근데 왜 절을 안 하고 빌어?” “(이런 잡것이..;;)아. 나도 몰라. 할머니네 할머니도 그렇게 했응게 비는 것이지.” “근데 왜 생선도 없고 고기도 없어?” 엄마가 대답했다. “올해 농사 잘 되게 혀달라고 비는 것잉게 잡곡밥허고 나물허고 탕만 올리는 것여. 깻으믄 인나. 이불개고 세수 허고 심바람 좀 혀. 시끄럽게 허지 말고.” 췟. 까칠하기능... 심부름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선 심부름을 시키기 전에 깨끗이 씻었는지를 묻고 씻었다고 하자 밥과 나물을 작은 그릇에 담아 주더니 밭에 가서 뿌리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밭에 왜?” “잔말 말고 시키는대로나 혀. 농사 잘되게 해달라고 허는 것잉게.”
지신에게 밥을 주는 것이었죠. 장독대에도 밥에 나물을 얹은 밥그릇을 하나 놓고 수돗가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장독대의 천룡신과 수돗가의 조앙신에게 장 상하지 말게 하고 물 상하지 말게 해달라고 고수레를 주는 행위였던 것이죠. 이렇게 고수레를 하고 식구들이 둘러 앉아 오곡밥에 묵은나물, 김을 더해 밥을 먹었습니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의 음식은 왜 이렇게 투박하면서 푸짐할까를 어릴 때부터 고민했지만 누구도 시원하게 답을 해 주지 않았는데 최명희 선생의 혼불을 읽으며 어렴풋이 그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혼불에서 죽은 머슴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일을 맞은 귀신이 밥을 먹으러 왔는데 밥을 먹지 못하고 멀뚱거리고만 있는거에요. 왜 저 양반이 밥을 못먹고 저러고 있나, 내가 뭘 잘못했나 하며 아들이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만 갖고 있는데 마님이 나타나 이러는 겁니다. 귀신도 평소에 먹던 대로 밥을 줘야 밥을 먹지. 평생 그런 그릇에 밥 한 번 안 먹어본 아부지가 어찌 밥을 먹겠누. 그래서 제상에 올려진 음식들을 함지박에 담아 바닥에 내려놓았더니 아부지가 맛나게 자셨다 카더라. 뭐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대목을 읽으며 대보름날 함지박에 담긴 음식이 떠올랐습니다. 농사 짓고, 장 담고, 물 길어오는 일을 관장하는 신들은 대부분 그 땅에 머물렀던, 살았던 자들의 영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평범했던 사람들,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던 사람들의 영혼. 그들에게 평소 할머니, 엄마가 먹던 그대로의 음식을 내 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아닐런지. 그 상 그대로 식구들도 모여 앉아 밥을 먹었습니다. 태생이 천한 놈이어서 그런지 그렇게 푸짐하게 차려놓고 먹는 보름밥이 가장 맛있게 느껴졌습니다.
이 날은 성씨가 다른 집에 찾아가 다섯 번 이상 밥을 먹으면 한 해 복이 들어온다 해서 집집마다 찾아가 밥을 얻어먹었는데 찾아가는 친구네 집집마다 푸짐하게 밥을 차려줬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들은 이 날은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기분 좋게 밥을 차려줬습니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음에도 집집마다 오곡밥에 들어가는 곡식이 달랐고 나물도 달랐습니다. 밥을 대신해 약식을 내 주는 집도 있었고 우리집에는 없던 취나물이나 간장에 볶은 가지나물이 있기도 했습니다. 건포도가 들어간 오곡밥도 있었고 밤농사를 짓던 친구집의 오곡밥에는 달콤한 밤이 들어가 있기도 했었지요. 정월 대보름에 먹는 대표적인 음식은 오곡밥과 묵은나물, 부럼, 귀밝이술입니다. 약식도 포함되지만 약식을 대신해 오곡밥을 먹는 것이니 약식은 제외할 수 있습니다. 오곡밥에 들어가는 곡물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대표적으로 찹쌀, 콩, 수수, 기장과 함께 은행이나 밤을 넣거나 콩을 다양하게 넣기도 합니다. 구지 오곡을 고집하지 않고 7곡, 8곡이라도 상관없겠죠.
쌀과 잡곡을 불려 밥을 짓는데 일반적으로 밥을 짓는 것과는 달리 찜솥에 쪄내는 것이 좋습니다. 찰밥을 하는 방법인데 찹쌀은 물과 함께 끓이면 끈적끈적 짓이겨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찜솥에 찌는 것이 좋습니다. 찜솥에 면보를 깔고 그 위에 곡물을 쏟고 찌는데 찌는 중간중간 간수를 뿌리고 저어가며 찌는 것이 좋습니다. 간수는 소금과 설탕을 1:1의 비율로 물에 녹인 것인데 찰밥을 찔 때 밥에 뿌려가며 찌면 간간하고 달콤한 찰밥이 됩니다.
묵은 나물은 봄부터 가을까지 채취해 말려뒀던 것을 물에 불려 볶은 것들인데 봄에난 고사리, 취나물, 산나물 등도 좋고 가을에 말린 토란대, 고구마순, 아주까리잎, 호박꼬지, 시래기 등도 맛있는 묵은 나물들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아주까리나물을 좋아하는데요, 들기름에 볶고 청장으로 간을 한 아주까리나물의 고소한 맛이 일품입니다. 아주까리(피마자) 정월 대보름은 그동안 모아두었던 모든 묵은 나물을 소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제 곧 봄이 다가오면 신선한 봄나물을 먹을 수 있으니 이날까지 모든 묵은 나물을 먹어치우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부럼을 깨는 것은 탁 깨지는 소리로 잡귀를 쫒고 부스럼을 방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밤, 호두, 땅콩 등 견과류를 먹는 것이죠.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말입니다. 귀밝이술인데 말이죠. 아하... 해장술을 권장하는 이 문화. 참으로 아름답다 여깁니다. 조반을 먹으며 한 잔씩 돌려 마시며 귀를 밝게 하자는 의미인데, 돌아오는 정월 대보름에 이 귀밝이술을 대취할 때까지 드셔야 할 분이 청와대에 계십니다. 하루 정도 꽐라진상이 되어도 좋으니 제발 귀밝이술 많이 드시고 귓구녕을 쫌 활짝 여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번 정월 대보름에는 청와대로 각 지역의 쏘주를 한 병씩 진상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딴지스들은 잊지 말고 정월 대보름이 오기 며칠 전에 청와대로 쏘주를 진상하시라!! 아차. 씨바쓰리갈도 갠찮겠네. 자금력 좀 갠찮다면 씨바쓰리갈로다... 네. 한 잔 하시고. 그 귓구녕 좀 어떻게 쫌!!
정월 대보름에는 묵은 것은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미를 담은 행사들이 밤까지 이어집니다.
집 안에선 대청소를 하고 장독대를 깨끗이 씻고 금줄을 두르기도 합니다. 방에 불을 때고 살던 시절에는 방구들에 구멍을 내고 온돌 사이에 낀 그을음을 긁어내기도 했습니다. 그을음을 긁어내지 않으면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방으로 스며들고 열이 전도되지 않아 아무리 불을 때도 방이 따뜻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그래를 이용해 그을음을 긁어냈는데 대청소의 일환으로 구들장 청소를 했던 것이죠. 마을 청년들은 모여 농악놀이를 하며 집집마다 찾아다닙니다. 지신밟기를 하는 것이죠. 잡귀는 시끄러운 악기소리로 쫒아내고 집을 지키는 지신은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놀이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밖에 나가 연을 날리고 놀았는데 정월 대보름까지만 연을 날려야 했기 때문에 해질 무렵이면 연을 높이 띄우고 연줄을 끊었습니다. 씨발. 왜 끊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이날 이후 연을 날리면 졸 혼나거나 쳐 맞았기 때문에 쳐 맞느니 끊고 만다 하며 눙물을 머금고 연줄을 잘라 냈습니다. 밤이 되면 아이들은 쥐불놀이를 하고 어른들은 달집을 태웁니다. 논두렁의 마른 풀들을 태워 쥐를 비롯한 세균을 옮기는 짐승들을 몰아 냈습니다. 아침부터 시작해 하루 종일 집안은 정갈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귀신들도 달랬고 청소도 말끔히 했기 때문에 밤의 놀이는 동구 밖에서 벌어집니다.
본래 밤의 역사는 이렇게 벌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자.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달은 휘엉청 떠있고 아이들은 어둠속에서 쥐불을 돌립니다. 일단 불이 돌아가면 몽환적인 느낌이 들게 마련이라. 꽹과리, 장고, 북, 징이 자글자글, 쟁글쟁글 거리면서 몽환적인 일렉트로닉사운드를 만들어냅니다. 그 소리에 몸도 달뜨고 마음도 달뜨는데, 커다랗게 달집을 쌓고 피운 불이 무시무시하게 타오릅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 그 커다란 불에서 번져나오는 무시무시한 열기, 몽환적인 사물놀이 싸운드. 여기져기 빙글빙글 돌아가는 불꽃. 차갑게 내려다보는 커다란 달. 눈이 획 돌아가죠. 복실이가 아무리 추녀라도 그 봉긋한 가심팍이 쎅시해 보이고, 영식이가 아무리 호구 좃병신여도 짐승남이 되는거라. 머머머...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것이 농사일과 집안일만 있다우?? 달집 태우며 함께 태우는 것이 묵은 소원만 있는 것이 아녀. 그날 밤 뜨겁게 태우는거지. 그 뭐랄까 묵직하게 웅크리고 있던 그 무엇을 말이지. 봄 되면 시집 장가 많이들 갔지. 다들 이렇게 시작한 거라. 암만. 지금은 크리스마스를 그날로 생각하는 사람들 많겠지만 쩝. 뭐 음... 낭만이 없어. 남녀가 불을 피우고 놀아야 뜨근뜨근 한 것인데... 촛불이라도 서너 개 밝혀 보단가.
이렇게 카니발리즘적인 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부터는 마을이 쥐 죽은 듯 조용합니다. 이제부터 놀지 말고 일하라는 것이죠. 개고생의 시작입니다. 그러라고 연줄도 끊었던 것일테죠. 농사의 시작입니다. 아직 씨앗을 뿌리긴 이르지만 농지를 정리하고 거름을 뿌리고 지심을 키워주기 시작해야 합니다. 봄이 되면 밭에 씨앗을 뿌리고 논에선 모내기를 합니다. 그렇게 음력 5월 5일 전까지 농사의 시작을 마치고 단오를 맞습니다. 지금이야 단오고 나발이고 일만하며 살지만 그 싱그러운 봄날, 하루 날 잡고 그네 타는 춘향이 속고쟁이도 훔쳐보고 그래야 살맛나지 않겠습니까. 날도 따땃하니 술도 한 잔 마시고, 씨름판에서 웃통까고 힘자랑도 좀 하고 말이죠. 한숨 돌린 단오를 지나면 백중까지 또다시 조옷빠지게 일을 합니다. 땡볕에서 허리가 끊어지도록 일을 합니다. 그러다 7월 15일 백중이 되면 논 농사가 마무리 됩니다. 이제 추수만 기다리면 되는 때가 된 것이죠. 그래서 이때는 지주들이 머슴들에게 돼지도 잡아주고 개도 잡아 먹이고 술도 말통으로 받아다 먹였습니다. 먹고 죽자 해도 되는 날이었죠. 그렇게 개고생을 했으니 든든히 먹이는 것이 도리이기도 합니다. 백중 지나면 추석이오고 추석 지나 추수를 마치면 입동, 동지로 이어지는 것이 한 해의 순환입니다.
명절은 달과 해의 움직임을 보고 중요한 날을 골라 의미를 두고 지낸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절에는 특별한 패턴이 없이 절기에서 중요한 날인 동지를 명절로 정했고 월력에서 중요한 날로 여기는 보름이 명절에 많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홀수가 겹치는 날을 명절로 삼기도 했습니다. 세시에는 한식, 망종, 강신일, 납일 등이 있는데 이 날들도 절기처럼 패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임의로 정한 날입니다. 가령 한식은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로 정한다는 식입니다. 절기와 명절, 세시가 얼추 구분이 가시는지요? 절기와 달의 순환에 대해 글을 쓰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1주일 단위로 생활하고 있지만 달과 해를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말씀’이 삶의 기준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해와 달이 삶의 기준이지 않았을까... 여전히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지면 휴식을 취하며 살아가지만 달이 차고 기우는 것엔 영 둔감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지상의 밤이 이제는 너무 밝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뜨고 지는 해와 달을 바라보며 그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지금보다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해 뜰 때 눈 뜨고 해 질 때 잠들며 보름달 떴을 때 달을 보며 쉬고 그믐날 어둠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잉여스러운 삶.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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