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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무신론

종교계의 흔하디 흔한 클리셰 홍수썰

by 다리디리다라두 2023. 2. 26.


※ 창조 과학회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종교변증론자들은 대홍수의 흔적이 전세계적인 것을 근거로 야훼의 존재를 주장하지만, 이것은 역으로 스스로의 함정에 발을 빠뜨리는 격이다. 대홍수의 존재가 어찌하여 노아와 노아의 방주, 그리고 야훼의 존재를 증명하는 인과관계의 고리가 된다는 것인가? 1950년에 내가 나무를 심었다고 주장하고, 그 해에 심은 나무가 많다고 해서, 내가 1950년에 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이 증명되는가? 그리고 내 아버지의 나무에 대한 사랑이 증명되는가? 이런 개나발같은 논리가 도대체 지구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노아의 방주를 굳건하게 신뢰하는 그리고 신뢰를 넘어서 사실로 공인받고 싶어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보다 먼저 본인들의 두뇌가 제자리에 있는지, 그리고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먼저 증명해야 할 것이다.

 

대홍수에 의한 격변의 증거 :

여러 민족의 전설과 세계 도처에 남아있는 대홍수의 흔적

 

 

임번삼 명지대학교 외래교수 전

대상그룹 식품당당 대표이사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이러한 격변설이 전지구적인 사건이었다면, 그리고 당시 사람의 수명이 수백세였다면 홍수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왔을 것이며, 세계 도처에 많은 증거들을 남겼을 것이다. 실제로, 세계도처에, 그리고 여러 민족의 전설 속에 지구적인 대홍수에 관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대홍수 전설들 현재 지구상의 200여 부족이 270여 종의 홍수에 관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 지역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는 바벨로니아 지방에서 시작하여 그리스, 스칸디나비아, 러시아, 에짚트, 중국, 인도, 페루, 브라질, 하와이, 피지, 수마트라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망라한다. 그 내용은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공통된 것은 홍수에 의한 우주적 격변, 구원받은 인종의 씨앗, 방주의 준비, 인류의 범죄, 신의 노여움, 구원받은 가족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기술내용은 노아홍수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Randy L. Wysong; Creation-Evolution: The Controversy, p 386, Inquiry Press, Midland, Michigan, 1978]

 

 

 

 

 

 

 

후레이져 (James Frazer, 1918)는 <구약성서 속의 민간전승> (Folklore in the Old Testament)에서 전 세계 지역에서 138 개의 홍수전설을 수집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네 가지의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첫째는 홍수를 야기한 도덕적 문란이며, 둘째는 신이 사람에게 홍수를 미리 예보했다는 사실이고, 셋째는 구원받은 몇 사람을 제외한 전 인류의 멸절과 마지막으로 동물들이 홍수의 시작과 종료를 알려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 밖에 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큰 배가 동원되었다는 내용도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홍수전설을 연구했던 커스탄스(1979) 역시 각 나라의 전설 속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하였다. 홍수의 원인이 인간의 타락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홍수에 대한 예고가 있었다. 인류가 모두 멸절했으나 일부가 생존하였고, 현생인류는 그 생존자의 후손이며, 홍수를 전후하여 동물들(특히 새들)이 홍수의 진척상황을 알려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홍수 후에 주인공들이 신께 희생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 등이다. [Arthur C. Custance; Flood Traditions of The World, The Flood: Local or Global?, pp 67-106, Grand Rapids, MI, 1979]

 

홍수에서 인류를 구원한 사람의 이름을 중국 전설에서는 ‘누와 (Nu-wah)’ 라 하였다. 중국 남부의 고산지방에 사는 묘족(苗族 Miao)들은 지금도 제사 때마다 선조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전통적인 주술문을 낭송하고 있는 데, 그 내용 역시 노아의 홍수장면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예컨데, 묘족의 전승은 대홍수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흙모래 섞인 비가 40 일간 쏟아져 내렸도다. 물은 산들과 산맥을 넘쳐 흘렀도다. 산채 같은 홍수가 계곡과 웅덩이에 뛰어 들었도다. 세계에는 발붙일만한 곳도 없었도다. 사람마다 좌절하며 무기력하게 되고 멸망케 되었도다...그러나, 족장 누아는 올바른 사람이었도다....매우 폭이 넓은 방주를 만들었도다....그와 함께 승선한 동물들은 암수 한 쌍이었도다...그 날이 이르자 물은 멀리 물러갔도다.” [Edgar Traux 저, 임번삼 역; 묘족에게 전승되어 온 창조이야기, 창조, 78호(4,5,6월호), p 4-5, 한국창조과학회, 1992]

 

 

(2) 아메리카인디언의 돌판그림

미국 디트로이트지방에서 발견된(1896.9.3) 인디언의 돌판을 보면(그림 14) 창세기의 내용을 그대로 도형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다섯 칸이 그려져 있는 데, 첫째 칸에서는 해가 내려 쪼이는 청명한 날에 한 사람(노아로 추정)이 기도하고 있다.

 

두번째 칸에는 물속에 빠진 사람들이 허우적거리고 있으며, 세 번째 칸은 방주가 물 위로 떠오르고 상단 좌우편에는 40 칸의 네모(40주야)가 그려져 있다. 넷째 칸은 방주에서 나온 네 사람(노아, 셈, 함, 야벳으로 추정)이 태양이 비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뻐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마지막 칸은 무지개를 바라보는 네 사람이 기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창세기에 이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노아의 제사를 받으신 후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심판치 않으시겠다면서 그 증거로 세우신 언약의 표시였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 부근에 사는 인디언들은 이 협곡들이 홍수로 만들어졌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홍수에서 인류를 구원한 사람의 이름을 하와이 원주민들은 ‘누’ 라고 하였다. ‘누와’, ‘누‘ 라는 표현과 ’노아‘는 우연의 일치일까?

(3) 길가메쉬 서사시

대영제국의 런던박물관에서 <서아시아 계형문자>(5권)를 저술한 로린손(Hery Rolinson 1810-1895)의 조수로 일하던 인쇄공출신의 스미스(George Smith 1840-1876)는 36세로 요절했지만, 불후의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쐐기문자의 기록에서 번역한 앗슈르바니팔의 역사>를 저술하여 성서고고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는 어느 날 라쌈(1852)이라는 사람이 니느웨의 앗슈르바니팔(Assurbanipal 669-627 BC)의 왕실서고에서 발굴한 24,000장에 달하는 방대한 점토판문서(627 BC)의 길가메쉬 서사시(The Epics of Gilgamesh) 11장(326행)을 읽다가 몹시 흥분했다고 전한다.

이 사진은 11장의 토판사진과 당시에 살았던 갈데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사진 11). 스미스가 밝힌 바에 의하면, 이 서사시는 주인공인 영웅 길가매쉬가 수메르의 우룩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생명나무를 찾아 배를 타고 출가하여 겪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커다란 뱀이 생명나무를 삼키자 신은 대노하여 홍수를 일으킨다. 그런데, 11장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가 창세기의 노아홍수의 기록과 등장인물의 이름이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치한다. [N.K. Sandars; The Story of The Flood, The Epic of Gilgamesh, Chapter 5, Penguin Books, London, 1972]

(4) 에블라의 창조이야기

페티나토(Giovani Petinato 981)는 <에블라의 고문서>(Archives of Ebla)에서 에블라 지역에서 114개의 2개 국어 번역사전이 발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모세보다 천여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므로, 이러한 증거만으로도 모세 때에 문자가 발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개발가설(開發假說)의 주장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에블라의 창조이야기는 기원전 16세기의 다른 바벨론의 기록들(Enuma Elish, Epic of Atrahasis)과는 매우 다르다고 한다. 이러한 증거들은 진화론적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도 창세기가 쓰여지기 천여년 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지구가 없었을 때에 그것을 만드셨고 낮의 빛이 없었을 때 그것을 만드셨고 월광이 아직 없었을 때 계셨도다.“

 

(5) 한자의 증언과 천단(天壇)

중국 한자는 삼황오제 시절 황제의 신하 창힐 (蒼頡 Tsieng Chih)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Hsin Cheng Yu; Ancient Chinese History, p 6, Taiwan Commercial Press, Taipei, 1963]. 한자는 처음에는 상형문자로 출발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표의문자(뜻글자)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상형 및 표의문자 속에 창세기의 사건들이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이 싱가폴의 강목사 (C.H. Kang)와 미국의 생리학자인 넬슨 여사(C.H. Kang & E.R. Nelson)가 260여개의 한자를 풀이함으로써 밝혀지게 되었다. [하현일 역; 창세기와 중국문자, 인쇄계사출판국, 서울, 1984, 원문은 The Discovery of Genesis, Thai Watana Panich Publishing Co, Bangkok, 1979] 이러한 창세기의 내용은 진시황 때 이사(李斯 220 BC)가 한자를 인장문자로 통일시키기 이전의 고대한자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중국문자는 전설적인 은나라(1711-1122 BC 추정)의 폐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자(甲骨文字)와 청동기 그릇의 안쪽에 새겨진 청동글자이다. 지금의 한자는 허신(許愼 86 BC)이 표의문자를 분석하여 집필한 설문문자(說文文字 120 AD)를 토대로 하고 있다. [전광호, 우재태역; 고대한자 속에 감추어진 창세기 이야기, pp 26-29, 인천, 1996, 원문은, Etherl R. Nelson, Richard E. Broadberry; Genesis and The Mystery: Confucius Couldn't Solve, CPH, St. Louis, Revised, 1994]

이 책들에 의하면, 공자(551-479 BC)가 쓴 서경(書經)에 기록하기를 순임금(2230 BC)이 “상제께 제사를 드렸다”고 했으며 [James Legge; The Chinese Classics(vol. 3), The Shoo King: Cannon of Shoon, Southern Material Center Inc. Taipei, pp 33-34, 1983] 그 내용은 창세기의 내용과 유사한 것이라 한다. 황제가 일년에 두 번씩 드렸다는 국경제사 봉선제(封禪祭 Sacrifice Offering)는 은나라 때부터 2천년간 계속되었으나, 기원전 6세기경부터 도교를 비롯한 민간종교가 등장하고, 기원전 3세기 경에 진시황의 분서갱유, 그리고 1세기 경에는 인도에서 불교가 들어옴으로써 다신론이나 범신론적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 이르러 청조(淸朝)는 다시 북경남쪽에 천단(天壇 1420)을 만들고, 황천상제(皇天上帝)께 제사를 지냈다. 그 후(1539), 천단의 남쪽에는 75미터의 3층 제단을 세우고 숫소를 번제로 드리고 주문을 외우며 제사를 지내어 오다가, 이 제사의식이 청나라가 망하면서(1911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한다. 넬슨 등이 저술한 책에 의하면 263자의 한자 속에 창세기의 기록이 내포된 한자들이 나오는 데, 그 중 몇 자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노아의 여덟(八) 식구(口)가 대홍수를 피하여 탔던 방주(舟)는 배선(船)자에 잘 나타나 있다. 홍수의 홍(洪)자는 여덟 명(八)이 하나로(一) 연합하여(手) 홍수(水)를 맞은 사실을 나타낸다. 떠다닐 연(沿)자는 여덟(八) 식구(口)가 물(水)위에 떠다녔음을 의미한다. 노아가족들(八)이 방주에서 나왔을 때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이 낮에 사람들이 일하러(工) 나가 텅빈 상태를 공(空)이라 고증한다. 즉, 여덟 사람이 한 지붕아래 있었던 동굴(穴)이 일(工)을 하러 나가면 텅 비게 된다(空)는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하나님께 제사드린 희생(犧牲)제물은 소(牛)나 양(羊)중에서 좋은 것(秀)으로 골라 창(戈)으로 죽여서 드리는 번제였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어린양(羊) 중에서 가장 좋은 것(秀)을 창으로 잡아(戈) 희생제를 드릴 때에 의롭다(義)고 칭함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하현일 역; ibid, pp 181-190]

 

(6) 중동지방의 지명들 지명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노아의 홍수기사에 나오는 아라랏산은 옛 지명 그대로이다. 산 주변에 사는 원주민들은 자기들은 노아의 후손들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토판문자가 만들어졌고, 길가메쉬 서사시가 기록된 바벨론 지역(지금의 이라크)의 두 강의 이름도 창세기에 나오듯이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히브리어로 힛데겔)로 불리우고 있다. 역시 창세기에 나오는 홍수 전후의 수많은 중동지역의 지명과 족속들, 노아의 10대손 아브라함이 살았다는 갈데아 우르(Ur)와 하란(Haran)이라는 성경에 나오는 옛 지명도 오늘날 그대로 남아 옛날의 역사를 무언으로 증언하고 있다.

 

(7) 노아방주의 발견

창세기에 기록된대로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해발 5,160m)의 정상부분 어딘가에 묻혀 있을 가능성에 대하여 많은 탐험가들이 발굴 작업에 나섰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경우만 하여도 1856년 이래 23회에 200명 이상의 탐험가들이 빙하 속에 묻힌 방주를 발견했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1883년에 터키정부도 노아의 방주를 발견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 창세기에 기록된 4-5천년 전의 노아의 방주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이 사실임이 판명되는 의미 외에도 오랜 전설적 사건이 현실로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한 것이었다. 아라랏산의 정상은 두 봉우리(5,160m와 5,126m)로 구성되어 있고, 두 봉우리 사이에는 거대한 빙하가 있으며, 일년내내 강풍이 휘몰아치기 때문에 그 속에 묻힌 방주를 찾기에는 어려움이 많다고 말한다. 반면에, 그러한 추위 때문에 지금까지도 방주가 보존되어 왔을 것으로 추측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탐험가들이 집중적으로 탐색하는 지역이 터키, 러시아의 국경선이 만나는 아르메니아의 아그리 다기(Agri Dagi)지역이다. [William H. Stiebing; Ancient Astrounauts, Cosmic Collisins and Other Popular Thorie About Man's Past, Prometheus Books, pp 22-23, Buffalo, NY, 1984], [Lloyd R. Bailey; Noah: The Person and the Story in History and Tradition, p 72, University of South Caliornia Press, 1989] 이러한 방주에 대한 증언은 매우 긴 역사를 가진다. 유대인 출신의 로마의 역사가인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를 비롯하여, 살라미스의 주교인 살라미스(4C), 초대교회의 교부인 크리소스톰, 중세기의 마르코 폴로(15C), 올리어리우스(Adam Olearius 1662), 윌리엄 휘스튼(1737), 에스토니아의 도르팟대학 교수인 패롯(Friedrich Parrot 1829), 터키주재 영국대사인 브라이스(James Bryce 1876) 등이 방주의 존재를 증언했거나, 직접 등정하여 확인했다고 말하고 있다. 터키정부는 지진(1883.5.2)으로 파괴된 그 지역을 영국대사관원들과 같이 조사하던 중 지상으로 4-50피트가 솟아 오른 거대한 목재선박의 구조물을 발견하고 노아의 방주라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The British Prophetic Messenger, Summer, 1886], [The Chicago Tribune, August 10, 1983], [New York Herald, August 10, 1883] 네스토리아파의 지도자인 죠셒(John Joseph 1887)은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방주를 목격했으며 (1887.4.25), 그의 이야기는 친구인 코언(1939)에 의해 상세히 기술되었다. [Frederick B. Coan; Yesterdays in Persia and Kurdistan, pp 163-165, Claremont: Saunders Studio Press, 1939]. 죠셒은 세계종교회의 의장인 배로우스의 초청으로 시카고 박람회에서 탐사결과를 보고하였다(1893). 그 때에 그는 말하기를 방주는 길이가 300야드에 100피트의 높이이며, 방주의 한 쪽 끝부분이 파손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Charles Beritz; The Lost Ship of Noah: In Search of the Ark at Ararat, p 26, G.P. Putnam's Son, New York, 1987] 벨지움 금융인들의 지원으로 죠셒은 방주의 일부를 분해하여 시카고 박람회장으로 옮기고자 했으나, 터키정부의 입국거부로 실행되지 못했다고 한다. [Tim La Haye, John C. Morries; The Ark on Ararat, Creation Life Publishers, El Cajon, Chicago, p 26, 1976] 20세기에도 탐험 활동은 계속되었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미국인 하고피안(George Hagopian 1902-10)은 돌처럼 굳은 방주를 목격했다고 했으며(William H. Stiebing 1984), 제정러시아의 로스코비츠키(Vladimir Roskovitsky 1916)는 아라랏산에서 선체의 1/4이 물속에 잠긴 전투함 크기의 물체를 발견했다고 보고하였다. [Vladimir Roskovitsky; Noah's Ark Found, The New Eden, Los Angeles, 1940 cited by La Haye & Morries, The Ark on Ararat, pp 76-70, 1976]. 이러한 보고를 받은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스 2세는 150명의 군인들을 보내어 방주를 측정하였다. 그 결과에 대해 백러시아군의 19연대 연대장이었던 쿠오 대령(Col. Alexander Koor 1915-16)은 자볼로츠키 소위가 아라랏산의 두 봉우리 사이의 등마루에서 처음으로 방주를 발견했다고 증언했으며 [Kelly L. Segraves; Search for Noah's Ark, p 28, Beta Books, San Diego, 1975], 로스코비츠키는 관측한 내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방주는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높은 천장을 가진 큰 방들도 몇 개가 발견되었다...울타리의 두께는 2피트 정도로 코끼리보다 10배나 큰 동물들을 가두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사용한 나무의 재질은 서양협죽도(Oleander)로 겉에는 페인트를 칠하면 전혀 썩지 않는다. 이 방주는 대부분의 시간을 냉동된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 [Vladimir Roskovitsky; New Eden Megazine, CA, 1939 cited by La Haye and Morries, The Ark on Ararat, p 79, 1979]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보고서는 볼세비키 혁명(1917. 2. 8)으로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했고, 그 후 이와 관련한 아무런 자료도 발견할 수 없어 신빙성에 대한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Berlitz; ibid, pp 32-34] 미국조종사들이 찍어 성조지(The Stars & Strife)에 실렸던 사진들도 1943년에 모두 분실되었다고 한다. 그 후, 미국 조종사들이 1960년 봄에 배와 같은 구조물을 발견했으나, 소련군의 감시로 사진을 찍지 못하고 귀향했다고 한다. [Beritz; ibid, p 42]. 최근에 방주를 가장 많이 목격한 사람은 프랑스의 나바라(1974)이다. 그는 1952년에 처음으로 방주탐사에 나서 얼음 밑의 거대한 배모양의 물체를 발견하였다. 1955년의 탐사 시 그의 아들과 같이 방주를 발견하고 5피트의 나무조각을 잘라내었다. [Fernand Navarra; J'ai trouve l'ache de Noe, Paris, 1956, Noah's Ark: I Touched It, pp 36-69, Logos International, Plainfield, NJ, 1974] 이 나무는 에짚트, 스페인, 프랑스 등의 박물관으로 보내어졌고, 분석결과 나무의 종류는 백참나무(white oak)이며, 최소 5,000년 이전의 것으로 발표되었다. [Navara; ibid, pp 125-132] 그러나, 미국의 분석기관에서는 1,190-1,340년의 젊은 연대치가 나왔다. 미국의 와이어트(R.E. Wyatt)는 11년간(1977-1987) 23회나 현장을 조사하고 수많은 증거물을 수집하였으며 '배 모양의 구조 속에 대형의 구조물이 있음을 확인“하고 노아의 방주가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Ronald E. Wyatt; 이것이 노아방주다, pp 20-26, 크리스챤월드, 1991]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터키 정부는 방주가 발견된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광목적으로 고속도로를 놓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많은 개인이나 단체들이 방주의 목격담을 증언하고 있으며, 특히 미국창조연구회(ICR)의 현 회장인 죤 모리스가 이끈 세 번의 탐사결과와 인공위성 (ERTS, SKYLAB)이 찍은 사진들(1972-1974)이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John C. Morries; The Search for Noah's Ark, Impact, ICR, No. 125, 1983] 이상에서 노아의 방주로 보이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살펴보았으나 아직은 그러한 증거들이 노아의 방주라고 단언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증거들이 노아의 방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앞으로 더 많은 탐험과 연구가 진행되어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랄 뿐이다.

 

(8) 갑작스러운 빙하기의 도래 빙하기는 진화론에서 주장하듯이 5-6회의 대 빙하기와 여러 번의 작은 빙하기를 거쳐 일만년 전에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아의 홍수 후에 갑자기 찾아온 추위와 격변에 의한 충격으로 맘모스와 같은 거대동물들이 얼음 속에 냉동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맘모스가 시베리아와 알라스카 및 카나다의 북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는 사실은 이 지역들도 홍수 이전에는 아열대 기후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울러, 빙하가 북극지역에 집중적으로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맘모스의 시체가 부패하지 않은 채 싱싱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갑작스러운 기후의 변화로 냉동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맘모스의 입과 위 속에서는 소화가 채 되지 않은 음식물들이 발견되기도 하는 데, 이는 음식물을 소화할 겨를도 없이 어떤 급변적인 사태가 발생하여 동사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일과정설에서 설명하는 이론대로 이들의 사체가 서서히 냉동되었다면 이미 부패되었거나 다른 동물들의 밥이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9) 공룡에 관한 유적들 북중미 지방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현생인류와 공룡의 발자국은 이들이 같은 시대에 살았음을 증명한다. 뿐만 아니라 1,800년대 말에 그랜드 캐년 부근의 하바수바이 계곡의 바위에서 공룡과 사람이 같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발견되었다. 아프리카의 로데지아의 살즈버리 동굴에서도 사람과 브론토사우루스 공룡(Brontosarus)의 그림이 같이 그려져 있다.

[R.L. Wysong; Creation-Evolution: The Controversy, Inquiry Press, p 378, Midland, Michigan, 1981] 수천년 전에 만들어진 멕시코 원주민들의 토우(土偶)중에는 한 여인이 등에 갑주를 달고 있는 새끼공룡의 목을 쓰다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그림 16). 미국의 한 동굴 속에 있는 벽화에는 공룡과 사람, 새들의 그림이 같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공룡에 대해서는 세계최고(最古)의 기록인 성경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 “이제, 소같이 물을 먹는 하마 (공룡의 오역으로 봄)를 볼지어다...그 힘은 허리에 있고 그 세력은 배의 힘줄에 있고 그 꼬리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넙적다리 힘줄은 서로 연락되었으며 그 뼈는 놋관같고 그 가릿대는 철장같으니“(욥 40;15). 욥이 4천여년 전 사람으로 추정되므로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사람과 공룡이 노아시대의 홍수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공존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1977), 뉴질랜드 근해의 300m 수심에 쳐 놓았던 일본어선(Zuiyo Maru, 大洋水産社소속)의 어망에 해상 공룡인 사경룡(Plesiosaur)의 시체가 인양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끌은 바 있다. 이 동물은 진화론적으로는 수천만년 전에 멸종한 것이다. 그러나, 2톤이 넘는 거대한 몸체에는 발굴 당시에도 살점이 붙어 있었고, 썩는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고 목격자들은 전한다. 진화론자들의 말대로라면 수천만년간 공룡의 살이 비록 썩은 상태라 할지라도 지금까지 존재했다고 믿어야 할 터이다. 반대로, 공룡이 지금까지 살았다면 그 동안 주장해 온 공룡의 멸절설도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사경룡의 시체가 지금도 발견된다는 것은 공룡이 최근까지도 사람과 같이 살았다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발견에 당황한 진화론자들은 그 동물이 공룡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으나, 일본의 학자들은 틀림없는 공룡이라고 확고하게 주장하며, 일본정부에서는 기념우표까지 발행한 바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괴물의 시체는 물속으로 다시 수장되고 말았다.

 

(10) 내륙에 있는 소금호수들 대홍수로 바닷물이 모든 육지와 산꼭대기까지 뒤덮었다면, 그리고 육지가 조산활동으로 바닷 밑에서 솟아 오른 것이라면 당연히 지구상의 여러 곳에 소금호수와 소금덩어리가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구상에는 소금호수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스라엘의 사해는 염해의 대표적인 예이다. 소금함량이 보통의 바닷물보다 10배 이상 짠 30% 정도이다. 그래서 비중이 높아 사람도 둥둥 뜬다고 하니, 수영이 서툰 사람도 거기에서 시험해 볼 만한 일이다. 몽고에 있는 고비사막의 염호들, 이란의 우르미아호(해발1,470m), 터키동부의 만호(해발1,700m), 안데스산맥의 티티카카호(해발3,800m)등 수많은 소금호수들이 세계 도처에 널려 있다. 민물호수가 물을 방출하지 못하면 수분의 증발로 소금함량이 늘어나 염호가 되리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소금호수가 생성되었을까? 해답은 언젠가 전 지구를 휩쓴 대홍수가 있었고, 홍수가 물러가면서 바닷물이 남은 곳에 염호가 형성되었고, 새로 생긴 빈 호수에 지하수와 빗물이 모여 민물호수를 만든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아라랏산의 해발 2,100m지점에서는 귤크기의 소금덩이들이 무수히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이나 호주 및 남미 등지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규모의 암염광산들의 존재도 해수의 증발에 의하지 않고서는 해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홍수 때 형성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11) 격변적 매몰에 의한 화석들 

 

생물들은 죽으면 며칠 만에 부패한다. 아니면 다른 짐승들의 먹이가 된다. 이것이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들이 화석이 되려면 긴 기간에는 아예 생성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짠 바닷 속에서라 할지라도 화석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거기서도 다른 물고기들의 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천만 개의 화석들은 한결같이 옛날에 큰 격변적 사건이 있었음을 무언으로 말해주고 있다. 입이나 위속에 소화가 안된 음식물이 들어 있는가 하면, 수영하는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고스란히 화석이 되어 있다. 공룡과 맘모스가 무더기로 화석무덤을 이루었다. 그런가 하면 부패하기 쉬운 잠자리, 해파리, 식물체와 같은 생물들도 화석으로 발견된다. 이는 부패하기 전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격변적 증거가 어디에 또 있을까? 남아프리카의 화석학자인 브룸(Robert Broom)은 20만평에 이르는 카루고원(Karoe)에 8천억 마리의 척추동물들이 묻힌 것으로 추산하고 있는 데, 그 동물의 대부분은 양서류와 파충류라 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미국 UCLA의 지질학 교수인 밀러 교수(W.J. Miller)는 “오늘 날 지구상에 있는 유기체들 가운데 화석으로써 보존되기 좋은 상황 하에서 퇴적되고 있는 유해들은 거의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토록 많은 수효의 화석들이 암석층 속에 파 묻혀 있는지 주목할만한 일이다.”고 하였다. 이는 격변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현상이다. 격변적 화석형성 이론은 동식물체들이 고온, 고압에 의해 순간적으로 매몰되면서 탄화되었다는 것이다

 

(12) 잔류지형들 (Relic Landforms)

빙하기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남북지반에서 발견되는 잔류지형이다. 빙하의 흐름에 의해 조성된 이러한 잔류지형은 카나다, 북미지역, 북유럽, 뉴질랜드, 아프리카 지역에 남아 있다. 지금의 기후조건으로는 이러한 지형을 남길 수 없으며, 형성사례도 근간엔 발견되지 않는다. 잔류지형은 “지금과는 다른 기후환경에서 만들어진 지형” (H.F. Garner 1974)을 말하는 데, 세계도처의 지형들은 대부분 잔류지형이다 (Budel & Garner). 이러한 말은 과거의 언젠가는 지금과는 다른 격변적 환경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은 기후 변화로는 그러한 잔류지형들이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재만; 잔류지형-홍수가 남겨둔 흔적, 창조 120호(5월호), 한국창조과학회, p 7-10, 2000] * 언더핏류 (Underfit Streams) ; 하상, 계곡, 준평원처럼 지금의 과정으로는 형성될 수 없는 엄청난 물이 흘러서 만들어 놓은 지형을 말한다. 미국과 유럽의 50% 이상이 언더핏류의 특징을 보인다고 한다(G.H. Dury, 1977). * 건조지역의 배수로 (Drainage System) ; 잘 짜여진 하천의 배수망은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지금은 건조한 사막지대에서도 그 흔적이 지형으로 남아 있다. 미국의 모하비 사막(Mojavi Desert), 데쓰밸리 사막(Death Valley Desert, California), 페루의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 해안절벽 (Inland Sea Cliffs) ; 해변가라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해안절벽들은 한때 전 세계에 급변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카르스트 니들 (Karst Niddles) ; 이것은 단단한 층에 깔린 석회암이 젖어 있는 상태에서 물리화학적인 작용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중국의 계림(桂林)과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다. * 잔류 모래언덕 ; 일명 에르그스(Ergs)라고 한다. 충적층의 암석이 빙하의 바람에 의한 풍화작용으로 모래가 되고 식생에 의해 안정한 형태가 된 것이다. 미국의 네브라스카주의 2/3 이상이 모래언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 건조 호수층(Dry Lake Beds) ; 물이 없는 호수바닥층을 말한다. 이러한 지형은 한 때 그 곳이 물이 가득한 호수였음을 말한다. 미국 서부의 건조지역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3) 인구의 증가 현재의 인구가 60억이다.

첫 인류가 출현하여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다면 이러한 숫자는 설명하기가 어렵게 된다. 노아(4,000-5,000년 전 추정)의 네 식구로부터 연간 인구증가율을 0.5% (현재는 2%)로 하여 계산하면 4,000년 정도로 충분하다. 엇셔가 주장한 대로 노아홍수가 4,300년 전에 일어났고,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현생인류가 유래했다면 (창9;19), 한 세대를 43년으로 계산하면 100 세대가 조금 지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창조과학회 자료실/노아의 홍수/노아의 홍수

http://www.kacr.or.kr/library/listview.asp?category=C01

*한국창조과학회 자료실/노아의 홍수/노아의 방주에 있는 많은 자료들을 참조하세요

http://www.kacr.or.kr/library/listview.asp?category=C02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인간이 아무리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지만, 노아의 방주가 사실이고, 대홍수가 사실이라고 해서 그게 어떻게 기독교의 논거가 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납득하기 힘들다.  하룻 밤 자고 나니 양말에 선물이 넣어져 있으니, 산타는 존재하고 자신은 착한 아이가 분명하다고 우기는 어린이와 뭐가 다르단 말이냐. 나는 그렇게 우기는 너에게 미안하지만 이렇게 대답해주련다.

"글쎄... 너희 아빠는 네가 착한 줄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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