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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에드워드 H. 카(Edward Hallett Carr) 著. 주석&수정

by 다리디리다라두 2023. 2. 26.

역사란 무엇인가

 

에드워드 H. 카(Edward Hallett Carr) 著

 

 

 
Historian and Fact

p17
액턴은 1896년 10월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 특별평의원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자기가 맡은 편집 사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Here is acton in his report of October 1896 to the Syndics of the Cambridge University Press on the work which he had undertaken to edit.
1896년, 액턴은 캠브릿지 대학 신문사 회의에서, 자신이 편집을 맡은 일에 관해 이렇게 보고했다.
John Emerich Edward Dalberg Acton :1834~1902 영국의 자유주의적 역사가·도덕가. 

 

p25
고대사와 중세사의 기록은 탈락으로 점철되어 있다. - J.B. Bury  Selected Essay (1930)
그러나 중요한 문제점은 탈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역사상이 불완전한 주요 원인은 많은 부분이 우연에 의해 상실된 데 있기보다는 대체로 그것이 아테네 시의 극소수 집단의 시민들에 의해서 만들어져 있다는 데에 있다.

 

p26
우리들이 읽고 있는 역사는 사실에 바탕을 두었다 하더라도,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라 널리 인정된 일련의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
G. Barraclough
無知는 역사가가 갖추어야 할 첫째 요건으로, 단순화하고 명료화시키고 선택하고 생략해야 한다.

Lytton Strachey

p39
역사란 해석이다. 사실상 조지 클라크 경을 거꾸로 세워놓고 내가 역사란 "의심스러운 사실이라는 과육으로 둘러싸인 해석이라는 단단한 핵"이라고 말한다면 내 말은 일방적이고 오해를 일으킬지 모르겠으나, 클라크 경의 본래의 말보다 더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History means interpretation. Indeed, If, standing Sir George Clark on his head,  I Were to call history " a hard core of interpretation surrounded by a pulp of disputable facts," my statement would , no doubt, be one-sided and misleading, but no more so, I benture to think, than the original dictum.

역사란 해석이다. 만약 내가 정말로 조지클라크 경을 벌세운 채, " 역사란 의심스러운 사실이라는 껍데기로 둘러싼 '해석'이라는 단단한 핵심이야"라고 말한다면, 일방적인 강요로 들릴 것이고 오해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클라크 경의 말도 그렇다
두번째는 더 잘 알려진 것으로서 역사가는 자기가 연구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행위 밑에 깔려 있는 사상을 상상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더 익숙한 개념이다. 역사가는 자기가 고찰하는 사람들의 사상과, 그로 인한 행동을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이해해야 한다.

 

p40
역사가는 자기 시대에 속한 사람으로, 인간 존재라는 조건에 의해서 자기 시대에 속박당한다.
The historian is of his own age and is bound to it by the conditions of human existence.
역사가도 그 시대에 속해서, 당대의 환경에 얽매어 살아가는 인류의 한 사람이다.

43
니체는 이 원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의견의 허위성이 곧 그 의견에 대한 반대는 아니다. …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생명력을 북돋아주고 생명력을 보존해 주며 종(種)을 보존하는가, 더 나아가서 종을 창조하느냐에 달려 있다."
Nietzsche had already enunciated the principle : " The falseness of an opinion is not for us any objection to it … The question  is life-furthering, life-presrving, spiecies-preserving perhaps species-creating."
니체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버렸다. "의견을 반대함에 있어서 이유는 진위나 오류의 존재 여부 따위가 아니다. … 중요한 것은 우리 인류 종족 유지와 보호 그리고 창조적 성장에 얼마나 보탬이 되는가가 아니겠는가."  

p44.
미국의 실용주의자들도 니체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지식이란 어떤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을 공언하지 않았더라도 실제로는 이에 못지않은 불안감을 주는 경우는 허다했다.

But, even where no such theory has been professed, the practice has often been no less disquieting.
profess : 1. (특히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다   2. (신조・감정 등을) 공언하다
disquieting : 불안을 조성하는
이런 이론적 근거와 관계없이 실제 그런 위험성은 허다하게 존재해왔다. 

만일 그가 빅토리아시대의 영국인을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으로 그려 내려 한다면, 그는 1850년에 스탤리브리지 웨이크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잊어서는 안된다. (1850년 스탤리브리지 웨이크스의 거리에서 싸구려 물건을 팔던 행상인이 하찮은 말다툼 끝에 노한 군중의 발길질에 맞아 죽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역사의 생명이라고  할 해석을 제거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 서술의 생명인 "해석"이라는 작업을 제거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비전문가들 - 역사학과 무관한 사람, 혹은 비전공자들 - 은 가끔 나에게 역사가들이 역사를 서술할 때, 어떻게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가를 묻는다.

p46
두가지 이론이란 곧 역사를 사실의 객관적인 편찬이라고 생각하고 해석에 대한 사실의 무조건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타당치 못한 이론과,
두가지 이론이란 첫째, 역사는 사실의 편찬이라고 생각하여, '해석'보다 '사실'이 무조건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이론과,
우리들은 앞으로 이 강연에서 사실과 해석이라는 이상과 같은 대립이 다른 형태 - 특수와 일반, 경험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앞으로 있을 강연에서, 사실과 해석이라는 역사관의 대립이 다른 형태의 대립(특수와 일반, 경험과 이론, 객관과 주관)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역사가는 잠정적인 사실 선택과 그러한 선택을 이끌어 준 잠정적인 해석 - 타인에 의한 것이건 자기 자신에 의한 것이건- 으로부터 출발한다. 일이 진행됨에 따라서 해석이나 사실의 선택 및 정리는 다같이 쌍방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미묘한 어쩌면 반쯤은 무의식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The historian starts with a provisional selection or facts and a provisional interpretation in the light of  which that selection has been made  - by others as well as by himself. As he works, both the interpretation and the selection and ordering of facts undergo subtle and perhaps partly in conscious changes through the reciprocal action of one or the other.
provisional : 임시의, 일시적인, (확정적이 아니라) 잠정적인
undergo : (특히 변화・안 좋은 일 등을) 겪다[받다]
subtle : [sʌtl] (흔히 호감) 미묘한, 감지하기 힘든 
reciprocal : 상호간의
역사를 서술할 때, 처음엔 불확정적인 선택과 그에 따른 해석을 가지고 선행되지만, 역사가의 작업이 진행되면서 이들은 상호작용을 거쳐 무의식적일지도 모르는 부분적인 미묘한 변화를 통해 다시 정돈된다.

Society And The Indivisual


p53
그러나 잘못은 '모아놓기' 전에도 사람들이 존재했다든가, 어떠한 종류의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But the fallacy is to suppose that they existed or had any kind of substance before being "brought together"
"모여서 살기" 전부터 사람들이 있었다거나,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추정은 틀린 생각이다.

p55
'인간성'이라는 포착하기 어려운 실체는 나라와 시대에 따라 다르므로, 인간성을 지배적인 사회적 조건과 관습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 현상으로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elusive entity 'human nature' varied so much from country  to conuntry and from century to century that it is diffcult not to regard it as a historical phenomenon shaped by prevailing social condition and conventions.
elusive [i|lu:sɪv] 찾기 힘든찾기[규정하기/달성하기] 힘든entity 1. [[U]] 실재(實在), 존재 2. 본체, 실체(實體), 실재물; 자주 독립체
'인간성'이라는 실체는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나라와 시대에 따라 다양화되었기에, 사회적 조건과 관습에 의해 형성된 역사현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차이의 가장 장 중요한 것은 여러 개인들 사이의 사회관계, 다시 말하면 사회 구성 양식에 대해 각각이 다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고,
But some, and perhaps the most important of these differences take the form of different attitudes to social relations between indivisuals, or in other words, to the way in which society should be constitued , so that
그러나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것들의 차이점은 개인들이 사회에 대한 태도의 차이(다시말하면 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들의 차이)를 갖게 한다는 것이다.

 

p64
역사가는 역사를 쓰기 전부터 이미 역사의 산물이다.
The historian, before he begins to write history, is the product of history.

곧 정치의 세계는 국가 이성과 정치 외적 요소이지만 결국은 국가의 생명과 안전을 무시하지 못하는 윤리 사이의 해결되지 않는 투쟁 무대가 된다. 마지막으로 그가 나치 세력때문에 학문의 영역에서 물러나고 있었던 1936년에 출간된 《역사주의의 성립》의 마이네케는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올바르다."라고 인정하는 듯한 역사주의를 배척하면서 또한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것과 초합리적으로 절대적인 것 사이에서 불안하게 동요하면서 절망을 부르짖고 있다.
the world of politics has become an arena of unresolved conflict between raison d'tat and morality which is external to politics, but which cannot in the last  resort orverride the life and security of the state. Finally the Meinecke of Die Entstehung des Historimus, Publiched in 1936, when he flood, utters a cry of despair, rejecting a historicism which appears to recognize that whatever is, is right, and superrational absolute.
Raison d'tat : 레종데따(프랑스어) 독일말로 슈타트레종(Staatsrason), 국가이성.
resort : 미국식 [rɪ|zɔ:rt]  1. 휴양지, 리조트 2. 의지, 의존(다른 대안이 없어서, 특히 좋지 못한 것에 기대게 됨을 나타냄)
           3. (특정 상황에서의) 제1/마지막/최후의 수단
Die Entstehung des Historimus : 《역사주의의 성립》
flood : 물에 잠기다[잠기게 하다], 침수되다[시키다]
utter : 1. (명사 앞에만 씀) (강조의 의미로) 완전한[순전한]

           2. <소리·말·신음·탄식 등을> 입 밖에 내다; 발언하다; 언명하다, 표명하다
despair : despair [명사] 절망 ex) She uttered a cry of despair. 그녀가 절망 어린 비명을 토했다.
superrational : 이성을 초월한, 이치로 따질 수 없는(beyond the scope or range of reason) ; 직관적인, 직감적인 (intuitional).
정치의 세계는 국가 이성과  윤리성(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초월할 수 없는 정치 외적 요소)사이의 대립의 장이 된다. 
마지막으로 나치에 의해 학계에서 축출된 1936년에 출간한《역사주의의 성립》에서 존재(현존)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역사주의를 거부하고 초합리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에서 절망과 탄식을 토로했다



p69
여기에서 나는 잘 다져진 땅에 들어서게 된다.
Here I am moving on to well-trodden ground.
well-trodden : (길 따위가) 잘 다져진, 사람이 많이 다니는.
많이 연구되어 잘 정리된 분야에 발들여 본다.

p76
2천5백만 명의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굶주림, 추위, 악몽같은 억압, 이것이야말로 철학적인 변호사, 돈 많은 장사꾼, 지방귀족들의 상처받은 자존심이나 대립적인 철학보다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이는 어느 나라, 어떠한 혁명에서도 마찬가지 였을것이다.
-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칼라일

또한 레닌은 "정치란 대중이 있는 곳에서 시작된다. 수천 명이 아니라 수백만 명이 있는 곳에서. 곧 진정한 정치가 시작되는 곳에서"라고 말했다. 칼라일이나 레닌의 수백만이라는 것은 수백만의 개인이고, 거기에는 비인간적 요소란 아무것도 없다. 이런 문제의 논의에서는 종종 익명성과 비개인성을 혼동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사람이 사람 이외의 것이 된다거나 개인이 개인 이외의 것이 되지는 않는다. 엘리엇 씨가 말한 "거대한 비개인적인 힘"은 보다 대담하고 솔직한 보수주의자인 크라렌던이 "이름도 없는 너절한 인간들"이라고 부른 개인이었다.

or as Lenin said "Politics begin where the masses are not where there are thousands but where there are millions that is where serious politics begin." Carlyle's and  Lenin's millions where millions of indivisuals there was nothing impersonal about them. Discussion of this question, sometimes confuse anonymity with impersonality. People do not cease to be people or indivisuals indivisuals, Because we do not know their names. Mr. Eliot's "Vast impersonal forces" were the indivisual whom Clarendon, a bolder and franker conservative calls dirty people of no name. 
impersonal : 1. 인간미 없는; 비인격적인 2. 특정 개인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것이 개입되지 않은 3. 비인칭의
anonimity : 익명, 무명, 작자불명, 신원불명.
frank :1. <이야기·사람·태도·의견 등이> 솔직한, 터놓는, 숨김없는 2. 노골적인, 공공연한 3. (병리) 명백한, 임상적으로 확실한
bold : 사람・행동이 용감한, 대담한
conservative : 1 (정치적으로) 보수적인(opp. progressive) 2 <사람·생각 등이> 보수적인, 전통적인, 조심스런, 신중한
또한 레닌의 말에 따르면 "정치는 대중이 있는 곳에서, 진정한 정치는 수천 명이 아닌 수백만 명이 모인 곳에서 싹튼다." 칼라일이나 레닌이 말한 수백만 명은 그들이 비인격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런 문제의 논의에서 종종 익명성과 비개인성이 혼동되어지는데 엘리엇이 말한 거대한 비개인적인 힘은 대담하고 노골적인 보수주의자 클레런던이 말한 "이름도 없는 너절한 인간들"이라고 부른 개인이었다.(익명의 다수)

These nameless millions were individuals acting, more or less unconsciously, together and consistituting a social force.
이러한 익명의 수백만은 다소간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개인들로, 하나의 사회세력을 형성한다.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p90
과학은 이미 정적인 것, 무시간적인 것을 다루지 않고,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다루게 되었다. 과학에서의 진화가 역사에서의 진보를 확인하고 보완해준 셈이다. 그러나 내가 첫번 강연에서 말한 바 있는, 역사학의 방법에 대한 귀납적 견해 (우선 사실을 수집하라, 그러고 나서 이를 해석하라는 것)을 뒤집을 만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 역시 과학의 방법이라고 의심없이 전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은 진화론 이후, 정적인 것을 다루지 않고 변화와 발전 즉, 동적인 것을 다루게 되었다. 과학에서의 진화론은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뒷받침해준 셈이었다. 그러나 내가 첫 강연에서 말한 , 역사학의 방법론에 있어서 귀납적 견해(선수집 후해석)에 문제를 제기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귀납적 방법 역시 과학의 하나로서 의심없이 전제되고 있었던 셈이다. 

p91
오늘날 역사가들이 백 년 전보다 과학의 세계에서 보다 편안한 느낌을 갖게 된 것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
역사가들이 백 년 전보다 오늘날 과학의 세계에서 더 편안해 하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p95
지금까지 착잡한 현실 속에서 우리들을 이끌어 준 안락한 공식을 잃어 버렸을 때…… 우리는 새로운 발판을 찾아내거나 헤엄치는 법을 배울 때까지는 마치 사실(事實)의 대해(大海)에 빠진 것과 같다.

p102
또 하나의 위험은 약 30년 전에 카를 만하임(독일의 사회학자)이 예견했고, 오늘날 매우 현저한 것으로서, 사회학이 "사회적 재적응이라는 일련의 불연속적인 기술적 문제로 분해되어 버릴" 위험이다. 사회학은 역사적 사회들, 곧 각기 특수한 역사적 내력과 조건에 의하여 형성된 독특한 사회들을 다룬다. 그러나 계산이라든가 분석따위의 이른바 '기술적'인 문제에 국한함을써 일반화와 해석을 피한다는 것은 靜的인 사회의 무의식적 옹호자가 되려고 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 하나 우려되는 점은 30여 년 전 카를 만하임(독일의 사회학자)이 예견했던 바와 같고, 오늘날 빈번히 일어나는 현상으로, 사회학이 "사회적 특수성에 재적용하는 학문 즉, 일련의 불연속적이고 기술적 문제로 분해되어 버릴" 위험이다. 사회학은 특수한 역사적 내력과 조건에 의하여 형성된 독특한 각각의 사회들을 다루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계산· 분석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로 국한시켜 일반화와 해석을 피하는 것은 사회의 靜的인 면만을 강조하는 것에 불과하다.

p107
카를 만하임에 의하면, "경험을 가다듬고 수집하고 정리하는 범주조차도 관찰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In Karl Manheim's words, "even the categories in which experiences are subsumed, collected, and ordered vary according to the social position or observer."
칼 만하임의 어록에 따르면, "사실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정렬하는 것조차도 관찰자의 사회적 지위에 달려 있다" 는 것이다.

p109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불확정성이 우주의 본질에 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주에 관한 지금까지의 우리의 이해가 불완전하다는 증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문제는 아직도 논쟁중이다.)

 

하여간 물리학에서 이러한 불확정성과 역사에 대한 우리의 예측 능력 사이에서 중요한 유사성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에도 일부 광신자들은 우주 내의 자유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를 그러한 불확정성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마찬가지 의혹을 품었었다.
하여간, 물리학의 불확정성과 사회과학에서 역사의 예측불가성에 대해 유사점을 찾으려는 일련의 노력에 회의심을 감출 수 없다. 몇 년 전 자유의지를 우주의 작용에서 찾을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한 일부 광신자의 주장에 사람들이 의아해했던 것과 같다.

p110
17,18,19세기를 지배하던 고전적인 인식론에서는 어느 경우나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에 명확한 이분법이 전제되었다. 그 과정이 어떻게 생각되었든 철학자들에 의하여 구성된 모델에서는 주체와 객체, 인간과 외계가 서로 구분되고 분리되었다. 당시는 과학이 탄생하고 발전하던 위대한 시기였던 만큼 인식론도 과학의 개척자들의 견해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인간은 외계와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인간은 외계를 다루기 어려웠고 잠재적으로는 적대적인 성질을 지닌  외계와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여기서 다루기 어렵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며, 적대적인 성질을 지녔다는 것은 지배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근세를 지배하던 고전적인 인식론은 언제나 인식주체와 그 대상을 명확하게 분리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찬란한 과학의 시대였기에 인식론 역시 선구적인 과학자들의 견해로부터의 영향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당시, 인간의 과학은 다루기 어렵고 적대적인 경향의 외계와 정면으로 대립하여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다루기 어려웠던 이유는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며, 적대적이라 함은 제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회과학은 그 모두가 주체와 객체를 엄격히 분리하는 인식론과는 양립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사회과학이 포함하는 인간이란,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고 연구자인 동시에 연구대상이기 때문이다.
요지는, 사회과학이 주체와 객체를 엄격히 분리하는 고전적인 인식론을 완전히 거스를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은,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고 연구자인 동시에 연구대상이기 때문이다.

p111
처음에는 현대물리학의 충격 밑에서, 지금은 현대 사회과학의 충격 밑에서 철학자들이 이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했고, 피동적인 의식에 자료가 부딪힌다는 인식과정의 낡은 撞球式 모델보다는 좀더 현대적인 모델을 구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사회과학 특히 역사학에 대해서는 하나의 길조이다.
철학자들은, 과거엔 현대물리학의 충격에서, 지금은 사회과학의 충격에서 헤어나려고 했고, 경험적 자료가 피동적인 의식에 부딪히는 撞求와 같은 낡은 형태를 벗어나, 현대적인 형태로 역사학의 모델을 구성하려는 움직임은 학계에서 반겨야 할 일이다.

p112
"사건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는 경우에는 신에 기대서는 안된다."
- K. von Fritz,  [The Theory of the Mixed Constitution in Antiquity]
"그것은 신의 섭리였다는 말로 역사의 모든 문제에 답하는 것은, 연구하는 사람들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우리들의 세속사는 인간세계의 드라마를 완전히 처리한 다음이 아니고서는 보다 넓은 사고를 끌어들일 수 없다."   - M.C.D'Arcy

p114
액턴은 크레이튼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덕적 규준이 확고부동함은 역사의 권위와 위신과 효용의 감추어진 비결이다."라고 언명하고, 역사를 "논쟁의 중재자, 길잃은 자에 대한  지침,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끊임없이 깍아내리려고하는 도덕적 규준의 옹호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액턴은 크레이튼에게 보낸 편지에서 "역사의 권위의 비결은 도덕적 규준이 확고부동함에 있다"라고 언명하고, 역사는 "논쟁의 중재자, 길잃은 자에 대한  지침,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끊임없이 깍아내리려고하는 도덕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p117 
네빌 체임벌린
아서 네빌 체임벌린(Arthur Neville Chamberlain, 1869년 3월 18일~1940년 11월 9일)
영국의 정치가, 외교관이다. 41대 영국 총리를 지냈으며, 정치인 조지프 체임벌린의 둘째 아들이다. 1931년 맥도널드 내각의 재무상에 올라 경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1937년 총리가 되어 이듬해 뮌헨 회의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외교 책임을 지고 이듬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p134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 : 대략 기원전 480년경~420년경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서양 문화에서 그는 "역사학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그는 체계적으로 사료를 수집하고 어느 정도 사료의 정확성을 검증하였으며 잘 짜여지면서도 생생한 줄거리에 따라 사료를 배치한 최초의 역사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저작 《역사》를 통해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기원전 490년에서 480~479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 대한 '탐구'(ἱστορίαι, 이 낱말은 라틴어 historia로 차용되어 오늘날 여러 유럽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기록으로, 특히 다른 문헌이 거의 없는 이 시기의 이야기 자료를 기록하였으며 그 밖에 자신이 지중해와 흑해 주변의 여러 지역을 널리 여행하면서 접한 여러 장소와 사람들에 대한 긴 여담을 많이 썼다. 그의 기록이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이 들은 것만 기록했다고 주장하였다.

 

 

 

헤로도토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페르시아 전쟁을 기록한 그의 《역사》에 간간히 언급된 기록 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약 30세를 전후로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니키아 그리고 스키타이 지역(현재 우크라이나 지방)을 두루 여행한 것으로 추측되며, 이 여행을 통해 수집한 많은 자료가 페르시아 전쟁을 주제로 한 그의 《역사》에 들여지게 된다. 특히 제2권에서 보게되는 고대 이집트 문명에 관한 기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서 이집트학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할리카르나소스 태생 헤로도토스는 인류의 업적이 후세에 잊혀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리스인 및 그 밖의 민족들의 훌륭한 발자취가 길이 남겨지도록 하기 위하여 여기에 자신의 탐구 기록을 펴낸다. 특히 여기서 무슨 이유로 이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되었는지 들어 깨닫게 될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440년경에 쓴 《역사》는 서양 최초의 역사책으로 여겨진다. 전 9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항쟁 유래로부터 페르시아 전쟁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저술되어 있는데, 제 9권은 미완성이다.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불렀다. 그러나 그의 역사 기술이 사실과 다르고 내용에 편향적인 시각이 들어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일례로 2세기의 작가 루키아노스는 풍자적인 요소가 강한 그의 작품 《실화》에서 헤로도토스를 거짓말쟁이로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고고학적, 문헌학적 발견으로 잘못이라 생각되었던 헤로도토스의 기술이 사실이었다는 것이 여러 차례 드러나면서 《역사》의 정확성에 대한 신뢰는 20세기 중반 이후 더 높아졌다.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내용에는 나일 강이 매년 범람하는 것이 남쪽 멀리 눈이 녹아서라는 증언이 있는데 헤로도토스는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더운 곳에 눈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또 이집트에서 만난 페니키아 뱃사람들은 아프리카를 돌아 항해하면서 서쪽으로 항해할 때 태양이 오른쪽에 떠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믿지 않은 증언들도 전달하면서 당시 지리학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투키디데스 기원전 465년경 ~ 기원전 400년경 고대 그리스 아테나의 역사가
기원전 5세기경 아테나와 스파르타가 기원전 411년까지 싸운 전쟁을 기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하였다.
아테나의 명문출신이며, 20대 중반에 페리클레스 정책에 동조하여 기원전 425년 또는 기원전 424년 군사 지휘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22년에 그가 지휘하는 아테나군이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국에서 추방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아테나로 돌아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쟁의 중대성을 예견하고 자료를 수집했던 그로서는,시간적으로는 불행했던 추방도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직접 체험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주제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작 서문에서 밝혔듯이, 신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인과 관계에 따라 분석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사료를 수집하여 과학적 역사관의 창시자로 인정받는다. 투키디데스는 정의보다는 패권에 기반하여 국가간의 관계를 보는 정치적 현실주의 학파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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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
François-Marie Arouet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 Marie Arouet)  볼테르 (Voltaire, 1694년 11월 21일~1778년 5월 30일)는 필명, 프랑스의 계몽주의 작가이다. 대표작으로《샤를르 12세사》, 《루이 14세의 시대》, 《각 국민의 풍습·정신론》 등이 있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대부(代父)인 샤토뇌프 신부가 그를 쾌락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귀족들과 시인들이 모이는 ‘탕플(Temple)’이라는 문학 살롱에 데리고 갔다. 17세에 루이 르그랑 학교를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이에 반대하며 법조계를 택하라고 강경하게 권한다. 그래서 법학 대학에 등록은 하지만 탕플을 계속 드나들면서 사치와 방탕을 선망한다. 이후에도 소(Sceaux) 성(城)의 문학 살롱을 드나들면서 재기를 발휘하며 문학적 재능을 증명해 보이던 그는 24세라는 아주 이른 나이에 《오이디푸스》(Oedipus, 1718)라는 비극 작품으로 유명해진다. 그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볼테르도 존중받는 장르였던 비극과 시로써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일찍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자유사상가와 사귀었다. 그는 '아루에(Arouet)'라는 평민의 성을 버리고 '아루에 2세(Arouet Lejeune)'의 글자 순서를 바꾸어 자칭 '드 볼테르 씨(M. de Voltaire)'가 되었다. 이 필명은 쉽게 받아들여졌고, 왕비는 친밀하게 그를 ‘내 가엾은 볼테르’라고 불렀다.
그러나 어느 날 슈발리에 드 로앙이 하인들을 시켜서 그를 곤봉으로 후려치게 한다. 자기의 좋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공작이나 후작들이 자신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만류하거나 옹호해주기보다는 재미있어 하는 것을 본 그의 분노는 극도에 달한다. 그는 슈발리에에게 결투를 요구했지만 그의 이 불손한 행위로 그는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영국으로 건너간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 풀려났다. 이러한 것이 불평등과 전제정치에 관해서 그가 겪은 첫 경험이 된다.
전제정치의 악폐를 통감한 그는 자유로운 영국에 공감을 가지고 로크와 뉴턴의 영향을 받아 비판정신은 더욱 강고히 되었다.
1729년 프랑스로 귀국했지만 <철학서간>(Lettres philosophiques)이 영국을 찬미하고 프랑스를 비방하였다는 이유로 당국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애인인 사틀레 후작 부인의 영지에 가서 10년간 저술과 연구를 하며 세월을 보냈다. 재미삼아 쓰고 익명으로 출간한 콩트들이 오늘날까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읽히고 널리 알려진 작품은 《캉디드》, 《자디그》(Zadig, ou la Destinee, 1748), 《랭제뉘》(L'Ingenu, 1767)이다. 디드로의 『백과전서』 집필에도 참여하는 등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평생 왕성한 활동을 벌인 볼테르는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지만, 프랑스 대혁명은 보지 못하고 1778년 5월 30일에 죽었다. 1791년에는 국가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만 들어가는 팡테옹에 안치되었다.
프랑스 계몽기의 대표적 철학자로 꼽히는 볼테르는 프랑스의 지성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종교적 광신주의에 맞서서 평생 투쟁했던 그의 저서들 속에는 당대의 지배적 교회 권력이었던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등장한다. 그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전통적 가치들의 토대인 기독교 정신을 무너뜨리려 하고, 풍기를 문란케 한다고 비난했다. 나이가 70세에 가까웠을 때는 그 유명한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종교적 불관용의 희생자들을 변호하고 돕는 활동들을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벌여서 오늘날까지도 관용의 상징적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볼테르는 개신교도 종교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진보적인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디드로 등의 백과전서파를 적극 지지하고 기독교적인 광신, 종교적 편견, 독단적 형이상학 등을 맹렬히 공격하면서 17세기의 이원론적 경향에 반기를 들어 뉴턴이 확립한 자연과학적 인식을 휴머니즘의 윤리에 의하여 현실 사회와 결부시키려고 하였다.

 

 

p137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년 ~ 1794년) 영국의 역사가. 《로마 제국 쇠망사》의 저자.
1737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15세의 나이로 옥스퍼드 대학교의 모들린 칼리지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종교 문제로 중퇴하고, 로잔에서 칼뱅파의 교육을 받았다. 원래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신봉하였으나 1754년 성공회신자가 되었다.
한때 군인 생활을 하고, 1764년에서 1765년 사이 프랑스·이탈리아로 여행하였다. 이때에 《로마 제국 쇠망사》를 저술할 생각을 하였다. 영국과 유럽을 오가며 생활하던 그는 1770년 부친의 별세 이후 영국에 정착하였으며 1774년 프리메이슨의 영국 런던 지구에 가입하여 1783년까지 하원 의원을 지냈다.1776년 2월에 로잔에서 《로마 제국 쇠망사》 제1권을 출간한 이래 1788년 제6권으로 완간하였다. 1794년 영국 서세스에서 별세하여 세필드 가족묘지에 안장하였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는 이후 역사학에 뿐만 아니라 경제학,정치학,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로마 제국 쇠망사》는 나폴레옹에게 제국의 야망을 갖게 했고 처칠이 자신이 '회고록' 을 집필하는 데는 '쇠망사'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또한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하는데 이 책에 대한 반항심이 작용했다고 한다. 이후 수많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 영감을 주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로마에 대한 기본자료들로 활용되고 있다. 역사상 로마와 관련된 저작중 제1의 권위를 가진 저서로 꼽힌다. 

 

p138

헨리 애덤스 :1838-1916  서양 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자서전 가운데 하나인 〈헨리 애덤스의 교육 The Education of Henry Adams〉의 저자이다.
애덤스는 보스턴 브라민 계급 출신이었다. 이 계급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혈통인 교양 있는 지식인 집단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이며, 할아버지는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였다. 아버지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1807~86) 역시 애덤스 가문의 지도자 전통을 계승해 외교관이자 역사가,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베를린대학교에서 민법 강의를 들으며 1859년 겨울을 보냈다. 1861년에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애덤스의 아버지를 영국 주재 공사로 임명했다. 23세가 된 헨리는 아버지와 함께 런던에 가서 1868년까지 아버지의 개인비서로 일했다. < North American Review〉지 편집장(1870~76)으로 일하면서 개혁운동을 계속한다. 개혁운동은 곧 좌절되었고 애덤스는 원칙이 없는 세계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선동적인 정치가들을 혐오했고 모든 사람이 '강력한 집단의 하인'이 되는 사회에 진저리를 냈다. 그는 "미국인들은 생각할 시간이 전혀 없다. 그들은 매일 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볼 수도 없다. 외부 세계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깊은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의 태도나 마찬가지다"라고 썼다. 익명으로 발표한 장편소설 〈민주주의, 미국식 소설 Democracy, an American Novel〉(1880)에는 그가 신념을 상실했음을 반영한다. 소설의 여주인공 매덜린 리는 권력 뒤에 있는 흑막을 알고 난 뒤, 이런 결론을 내린다. "민주주의는 내 신경을 산산조각내버렸다."
1870년 하버드대학교 총장 찰스 W.엘리엇에 의해 중세사교수로 임명되었고 미국에서 처음으로 역사를 가르치는 데 세미나 방식을 채택했다. 그는 발전중인 미국 민주주의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미국의 초기 국가 시대를 계속 탐구했다. 이 연구의 결실이 〈미국사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9권, 1889~91)로, 제퍼슨부터 매디슨까지의 정부를 다루었는데 출판되자마자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 저서에서 그는 권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을 통해 평등주의에 사회를 통치하는 모순에 관해 연구했다. 1870년대부터 그의 말년까지 지식인들은 그의 집에 모여 예술·과학·정치·문학을 토론했다.
프랑스에 있을 때 애덤스는 '자기 시대까지 내려온 동향을 측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 하나의 고정점'을 찾기 위해 역사의 구석진 곳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갔다. 그 고정점은 13세기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이었다. 그는 〈몽 생 미셸과 샤르트르 Mont-Saint-Michel and Chartres〉(1904 자비 인쇄, 1913 정식 출간)에서 중세의 대성당에 반영된 세계관을 설명했다. 그는 이 건물들이 '인간이 느끼는 가장 깊은 감정, 즉 무한한 존재를 파악하려는 지극히 작은 인간의 노력'을 표현한다고 믿었다. 중세의 매력은 그 시대의 이념적 통일성, 즉 가톨릭 신앙 속에 표현되어 있고 성모 마리아로 상징되는 일관성 때문이었다.
〈몽 생 미셸과 샤르트르〉의 자매편인 〈헨리 애덤스의 교육〉(1906 자비 인쇄, 1918 정식 출간)은 애덤스의 저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이며 자서전의 걸작으로 꼽힌다. 앞의 책과는 대조적으로 이 책은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20세기의 세계, 특히 과학과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세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애덤스는 중세의 성모 마리아에 맞서는 20세기의 새로운 신(神)은 근대사의 무질서한 힘을 상징하는 다이나모('발전기')로 보았다. 그는 당시 생활의 원심력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의 실패를 기록했다. 이 책은 애덤스가 관습에 얽매인 세계에서 태어나 확실성이 사라진 근대의 실존주의적 우주로 옮아가면서 현실과 대결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역사도 교육도 해답을 주지는 않았다. 그는 개인이 현실과 맞설 수 없다고 믿고 인간은 현실을 견디기 위해 환상을 받아들인다고 보았다. 13~20세기의 연결선을 그으려 했던 그의 노력은 결국 헛수고로 끝났다.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변화뿐이라고 애덤스는 결론지었다.
애덤스는 객관적이면서도 신랄하고 풍자적인 문체로 유명하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일부 비평가들은 그를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성미 급한 부적격자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가 중세시대에 매혹되고 자신의 실패를 계속 강조한 것은 염세주의를 감추기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좀더 동정적인 논평가들은 애덤스를 20세기의 혼돈과 폭력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애썼던 낭만주의적 인물로 간주한다. 그러나 애덤스 자신이 말했듯이, 그는 "민감하고 소심한 사람들이 몸서리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세계"를 찾고 있었을 뿐이다.

 

p138

이 쯤에서 딱히 내키지는 않지만 역사에서 인과관계를 논하는 과정에서 빠지기 쉬운 두 개의 함정에 대해 논해 보고자 한다. 첫번째는 '역사에서의 필연'이라는 함정으로 '헤겔의 간계(奸計)'라는 딱지가 붙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역사에서의 우연'으로,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먼저 왜 이러한 문제 제기가 있는가에 대해 한두 마디 하겠다.

칼 포퍼 교수는 1930년대에 빈에서 과학의 새로운 관점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논리》를 출간한 바 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보다 대중적인 성격을 지닌 두 권의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및《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1957년이며 거기에 실린 논문은 대개 1945년을 전후로 발표된 것들이다.)을 영어로 출판했다. 이 두 권의 책에서 그는 플라톤과 함께 나치즘의 정신적 원조를 헤겔로 다루고 1930년대의 영국 좌익의 지적 풍조의 기반이 천박한 마르크스주의라고 하며 그에 대한 강한 반발이라는 다소 감정적인 기분 속에서 집필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된 공격대상은 헤겔 및 마르크스의 결정론적 역사철학인데, 이들을 역사주의라는 난폭한 명칭으로 묶어 버린 것이다.

 

역사주의(Historicism)에 대한 각주:
나는 엄밀함이 요구되지 않는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역사주의'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해왔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대한 포퍼 교수의 저술들이 널리 읽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말의 의미를 공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용어의 정의를 끊임없이 고집하는 것은 현학적 태도이다. 그러나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는 알아야 한다. 포퍼교수는 자기가 싫어하는 역사관은 무엇이든 쓸어담아서 '역사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관에는 건전해 보이는 것도 있지만,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진지한 저술가라면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포퍼 교수 자신이 《역사주의의 빈곤》에서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는 지금까지 어떠한 저명한 '역사주의자'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역사주의적'논의를 고안해 내고 있다. 그의 저서에는 역사주의는 역사를 과학과 동일시하는 학설과 이 양자를 명확히 구분하는 학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열린 사회》에서는 예언을 피한 헤겔이 역사주의의 고위 성직자로 취급되고 있는가 하면 《역사주의의 빈곤》의 서론에서 역사주의는 "역사적 예언을 주요목표로 삼는 사회과학적 접근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Historicism'은 보통 독일어의 'Histortismus'의 영역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포퍼 교수는 'Historicism'과 'Historism'을 구별하여 그렇지 않아도 혼란한 이 말의 용법에 더욱 혼란을 주고 있다.M.C.D'Arcy는 The Sence of History: Secular and Scared (1959), p.11에서 역사주의라는 말은 '역사철학'과 동일한 것으로서 사용하고 있다. 

 

p140

1954년 아이자이어 버린 경은 '역사적 불가피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는 여기서 플라톤에 대한 공격은 삼가하고 있다. 아마도 옥스포드 대학을 떠받쳐 온 오랜 支柱에 대한 예우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는 포퍼교수의 비난에 덧붙여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논리를 펴고 있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함」으로서 카를대제나 나폴레옹, 스탈린 같은 인물들 단죄해야 할 역사가들의 의무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할 우려가 있으므로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 외에는 포퍼 교수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물론 아이자이어 버린 경은 저명한 저술가이므로 그 영향력은 대단하다. 지난 5-6년간 영미에서 역사관련 논문을 썼다거나, 단순한 논평을 한 사람조차도 거의 예외없이 이러한 태도를 견지한다. 그들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결정론을 잘 안다는 듯이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역사에서 우연의 역할을 간과한다며 어리석음으로 치부해 왔다. 아이자이어 버린 경에게 제자들의 잘못까지 책임지게 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더우기 넌센스한 태도는 애교있고 매력적이므로 참을 만하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넌센스만 되풀이할 뿐 매력은 업다. 새로운 것도 없었다. 찰스 킹즐리(영국의 성직자, 역사가, 소설가)는 영국의 근대사 흠정 강좌 담당교수들 중 출중한 학자도 아니고, 헤겔을 읽어본 일도 없고, 마르크스에 대해 들어본 일도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1860년 웨스트 민스터의 평의원 취임강연에서 역사에는 '불가피한 연속' 있을 수 없다는 증거로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의 법칙을 무너뜨릴 수 있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킹즐리를 이미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의 송장같은 어록에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들이 바로 포퍼 교수와 아이자이어 버린 경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약간의 인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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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선 결정론부터 다루어 보겠다. 異論이 없기를 바라면서 나는 결정론이라는 것을,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으며, 원인에 변화가 없다면 결과에도 변화가 없다는 신념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결정론이란 역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관한 문제이다. 원인이 없는 행동은 앞에서 다룬 '사회밖에 존재하는 개인'과 같은 하나의 抽象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사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포퍼 교수의 주장은 무의미하거나 거짓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렇게 믿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는 공리는 우리들의 주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능력의 하나의 전제조건이다. 카프카 소설의 몽환적 성격은 어떠한 사건이든 명확한 원인, 확인할 수 있는 원인이 없다는 사실에서 온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인격을 전면적으로 붕괴시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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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일부분이지만 확인가능한 원인과 사건을 통해 행동의 과거와 미래의 결과를 지침으로 삼아 인격이 형성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은 원칙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전제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은 불가능할 것이다. 옛날에는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신이기 때문에 자연현상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자이어 버린 경은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의지에 지배를 받는다는 근거에 반대하지만, 이러한 반대도 역시 동일한 사고방식에 속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의 사회과학이, 이러한 종류의 반대를 받고 있던 자연과학의 발전단계와 동일한 단계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이 이 문제를 어떠헤 처리하고 있는가를 보기로 하자. 여러분은 매일매일 일과를 시작할 무렵 스미스를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날씨나 대학 형편에 대해 친절하지만 별 의미 없는 말로 그에게 답례할 것이다. 스미스 역시 날씨나, 돌아가는 형편에 대해 의미는 없으나 친절한 말로서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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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역사가의 경우는 어떠할까? 역사가도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에는 원칙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원인이 있다고 믿는다. 만일 이러한 전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것처럼 역사적 과정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원인을 연구하는 것이 바로 역사가의 특수한 기능이다. 역사가가 인간의 행동에서 결정론적 측면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가 자유 의지를 부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유 의지에서 나온 행동에는 원인이 없다고 하는 당치도 않은 가설을 거부한다는 것뿐이다. 또한 불가피성이라는 문제도 역사가에게는 큰 고민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역사가도 때로는 과장된 용어를 사용해서 어떤 사건이 "불가피"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요인의 결합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건을 기대하게 할 만큼 압도적으로 강했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요즈음 내가 쓴 역사책에 이런 말이 나오지 않나 조사해 보았는데, 결국 나 자신에 대해서도 완전무결한 건강증명서를 제시할 수는 없다. 가령 어떤 대목에서, 나는 1917년 혁명 후에 볼셰비키와 그리스 정교회의 충돌은 불가피했다고 쓴 일이 있다. 물론 "개연성이 매우 높았다"라고 썼던 편이 훨씬 현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정에는 어딘지 현학적인 구석이 있지 않을까?  사실상 역사가란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 사건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가들은 선택의 자유를 전제하고, 이야기의 주인공을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과정도 논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왜 다른 과정을 밟지 않고 특정한 과정을 밟게 되었는가를 아주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하지만, 어떤 일이건 그것이 다른 결과를 초래하려면 선행되는 원인 자체부터 달라야 한다는 형식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면 역사에서는 불가피한 것은 없다. 나는 역사가로서 '필연적인', '불가피한','빠져 나올 수 없는' 또는 심지어 '모면할 수 없는' 등의 말을 쓰지 않고서도 일을 해나갈 수 있는 준비를 완전히 갖추고 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은 더욱 단조로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시인과 형이상학자들에게 맡겨 놓자.

 

p145

장미 전쟁 (薔薇戰爭, 영어ㅌ: Wars of the Roses)은 붉은 장미를 표시로 삼은 랭커스터 왕가와 흰 장미를 표시로 삼은 요크 왕가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었다. 1455년부터 1485년까지 벌어졌다.

 

 

 

 

 

 

정신 이상이 된 랭커스터가의 헨리 6세를 요크가의 리처드가 섭정하자 이를 위험하게 여긴 왕비가 리처드를 추방했다. 그가 돌아와서 장미전쟁이 시작되었다. 랭커스터왕군은 요크군을 격파하고 리처드가 전사했으나, 아들인 에드워드4세가 랭카스터군을 무찌르고 헨리6세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4세가 사망했을 때 두 명의 젊은 왕자와 왕녀가 있었으나, 의회는 왕자를 서자라고 선언하고 섭정이었던 리처드가 왕위에 올랐다.
이에 어머니 계통으로 왕실에 연결된 랭카스터 가의 유일한 왕위 요구자인 헨리 튜더가 프랑스의 루이 11세의 지원을 받아 리처드 3세를 격파하고 헨리 7세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장미 전쟁은 끝나고 튜더 왕조가 열리게 되었다

윌리엄 1세(William I of England)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 또는 서자왕 윌리엄(William the Bastard), 노르만 왕조의 시조이자 잉글랜드의 국왕이다.
1035년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그는 노르망디 공국을 서 프랑크 왕국(프랑스)과 대등할 정도로 발전시켰다. 1066년 도버해협을 건너 잉글랜드 침략을 개시하여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왕 해럴드 2세에게 크게 승리하였다.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점령함에 따라 잉글랜드의 왕조는 노르만 왕조가 되었다.

 

 

 

스톨리핀 토지개혁 [Stolypin land reform, ― 土地改革]
농민들이 개인적으로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한 러시아 제국 정부의 조처(1906~17).

그 목적은 부지런한 농민들이 자신의 땅을 갖도록 권장하여, 궁극적으로 부유하고 보수적인 농민 계층을 육성함으로써 농촌을 안정시키는 한편 니콜라이 2세의 독재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정부는 1861년에 농노를 해방한 뒤 각 농가에 토지를 나누어주었으나, 토지는 농촌공동체가 집단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농촌공동체는 땅을 여러 조각(地條)으로 나누어 각 농가에 경작을 맡기는 것이 전통이었다.
농노가 해방된 뒤 농업의 경제적 수익성이 떨어지고 1905년 혁명 때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공동체의 토지 집단소유제를 폐지하고 개인소유제로 바꾸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06년 11월 22일(구력 11. 9) 두마(공식 입법기관)의 회기가 아닐 때, 러시아 총리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은 각 농가가 자신에게 할당된 토지의 개별 소유권을 주장하고 공동체에서 탈퇴할 수 있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농가는 또한 경작하고 있던 분산된 땅을 모두 합한 것과 맞먹는 땅을 공동체에 요구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 포고령은 각 농가에 딸린 식구들이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는 토지 공유제를 폐지하고 각 농가의 가장을 유일한 토지 소유자로 만들었다. 1910년에 두마는 마침내 이 포고령을 승인했고, 1910년과 1911년에 이 포고령을 확대한 법률을 가결했다. 이 토지개혁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16년말까지 자기 땅을 소유한 농가는 전체 농가의 20%에 불과했고, 한 덩어리로 통합된 땅을 받은 농가는 그보다 훨씬 적었다(약 10%). 또한 농민을 독재정치가 필요로 하는 확고한 지지세력으로 바꾸지도 못했다. 결국 1917년 혁명 때 농민들의 재산을 다시 몰수했다.

스톨리핀 :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 1862년 바덴바덴 ~ 1911년, 러시아 제국의 총리
1911년 9월 18일 암살될 때까지 차르 니콜라이 2세 밑에서 대신회의의장(총리)을 역임하였다.
니콜라이 2세의 치세기간 동안 세르게이 비테와 나란히 유능함을 발휘한 실력 좋고 수완 좋은 정치가였다.
  특히 분파와 무관하게 농업분야를 중심으로 지방자치의 근대화, 사법, 중앙행정기구에 걸치는 광범한 개혁을 실행하였다. 

 

 

 

 

 

 

 

스톨리핀은 공산당 등 혁명세력을 강력히 탄압했다. 테러범은 체포 즉시 처형했고, 교수대가 '스톨리핀 넥타이'라 불릴 정도로 사형 선고가 잦았다. 그런데 스톨리핀은 공산당만 탄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혁명이 대중의 지지를 얻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정부 내 부정부패 사범들을 대거 내쫓았고, 농지를 공동 소유에서 개인 소유제로 바꾸어 농민 개개인에 분배하는 등 사회 각 분야에 폭넓은 개혁 정치를 실시했다. 스톨리핀 집권의 장기화를 지켜보던 레닌이 '내 생전에 혁명을 보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는데, 이는 스톨리핀의 개혁이 혁명을 탄압하는 동시에 민심을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개혁정치 때문에 스톨리핀은 혁명 세력과 보수 세력 양측의 미움을 받았고, 결국 1911년에 황실 및 보수 세력의 사주로 여겨지는 암살을 당하고 만다.
스톨리핀에 대한 시각은 여러 가지 존재하지만, 그 시각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스톨리핀의 죽음에 따라 러시아 혁명이 급속히 다가왔다는 것이다. 황실과 귀족 세력이 스톨리핀의 개혁을 거부한 결과, 혁명 세력이 다시 민심을 얻었다. 또한 황실은 내부 혼란에 빠졌고, 혁명을 수습할 능력도 없었다. 스톨리핀 사후 10년도 안돼 혁명이 일어났다. 황실과 귀족은 혁명 후 대거 처형당했다. 그들이 개혁을 택하지 않은 결과는 급진 혁명이었다.

 

p146

그러나 이것은 결정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결정론자들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원인이 있었어야 한다고 답할 것이 뻔하다. 이러한 가정은 역사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문제는 오늘날 노르만 사람들의 정복이나 미국의 독립전쟁의 결과를 뒤집어 엎겠다면서, 이러한 사건의 부당함에 항거할 열정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에 있다. 역사가가 이러한 사건들을 완결된 장으로 취급하는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대사의 두통거리는, 모든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던 때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여지가 기정사실에 의하여 모두 끝나버렸다고 보는 역사가의 태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점에 있다. 이것은 순전히 감상적이고 비역사적인 반발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역사적 불가피성'을 말하는 학설에 반대하는 최근의 반대운동을 가장 크게 고무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하며 또 여기에 걸려들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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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의 또 하나의 근거는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유명한 難問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nbsp;필로파토르

기원전 69년 - 기원전 30년,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이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부왕이 죽은 뒤(기원전 51년) 18살에 15세가 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재위: 기원전 51~47년)와 결혼하여,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왕조의 권력 기반인 그리스계의 외면으로 자리에서 일시 물러났다.
기원전 48년, 클레오파트라 7세는 폼페이우스와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이집트에 온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협상하였다. 카이사르의 힘으로 다시 파라오 자리에 복귀한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물리친 후 정치에 몰두하였다. 기원전 47년 3월 27일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이후 2주일 동안 클레오파트라와 지낸 뒤 이집트를 떠났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실제로 카이사르의 아들이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에는 기원전 42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협동하였으며 3년 후 결혼하였다. 결혼 후 그녀는 남편 안토니우스의 권력투쟁을 경제적으로 도운 대가로 페니키아, 유다 등의 쓸모 있는 영토를 할양받아 확장하였다.
권력구조의 변화로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레피두스와의 삼두정치가 깨지자 클레오파트라 7세는 BC 31년 9월 2일 명분상 자신에게 선전포고한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여 안토니우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을 결행했다.
하지만 전쟁은 실패하였고 자신을 일개 이집트 여인으로 취급하는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할 수 없음을 직감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했다. 뱀에 물려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자살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죽여놓고 뱀에 물려 자살했다고 발표해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뱀에 의한 자살, 독가스에 의한 자살, 타살, 에이즈(AIDS) 감염에 의한 병사(病死) 등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변했을 것이다'라는 말은 파스칼의 <명상록> 속에서 등장하는 말이다. 원문을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허무함을 충분히 알고자 한다면, 연애의 원인과 결과를 내다보면 된다. 연애의 원인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이며, 그리고 그 결과는 두려운 것이 되어 버린다. 이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찾아낼 수도 없을 만큼 희미한 것이지만 전 지구를. 황제들을, 군대를, 전 세계를 뒤흔들어 놓는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모든 표면은 변했을 것이다. ..."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유혹할 정도의 미인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안토니우스를 유혹할 정도의 미인이 아니었다면, 공화국으로서 로마가 좀더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며, 또한 로마의 황제정과 팍스로마냐의 모습도 조금은 다른 형태로 나타났을 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가 강대국 로마 제국을 이용하여 나라를 보전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녀의 진짜 모습은 미모로 남성들을 유혹하는 요녀가 아니라, 궁전 밖의 세계를 다스리고자 한 여걸(女傑)이었다는 관점이 있다.

 

p148

역사에서의 이러한 이른바 우연은 역사가가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인과의 연쇄를 중단하는 (말하자면 충돌하는 )것을 말한다. 베리는 두 개의 독립된 인과의 사슬의 충돌"이라고 말했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아이자이어 버린 경은 「역사적 불가피성」이라는 논문의 서두에서 「우연사관」이라는 버나드 베런슨의 논문을 인용하고 칭찬하고 있다 하지만,베런슨은 이상과 같은 의미의 우연과 인과적 결정의 부재를 혼동하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한명이다.

 

Bernhard Berenson. 1865.~ 1959. 러시아(리투아니아) 태생 미국의 미술비평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평론에 특히 뛰어났다. 미국 보스턴에서 성장해 하버드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887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통찰력있는 지성과 인문과학적 지식도 갖추고 있었다.

 

여기서 우선 잠깐 숨을 돌려 역사에서의 우연의 역할이 최근에 와서 왜 그렇게 널리 강조되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살펴보기로 하자. 폴리비우스는 아마도 이 문제를 체계적인 방식으로 다룬 최초의 역사가가 아닌가 여겨지는데. 그 이유를 빠르게 규명한 것은 기번이었다. 곧 그는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나라가 한 속주의 지위로 떨어졌을 때 로마의 승리를 공화국의 장점때문으로 보지 않고 행운때문이라고 보았다."고 말했다. 타키투스 또한 조국의 쇠퇴기에 살았던 역사가로, 그 역시 우연에 대한 성찰에 골몰했던 또 하나의 고대적 역사가이다.

폴리비오스 [Polybios]BC 200경 아르카디아 메갈로폴리스~ BC 118경.
그리스의 정치가·역사가.

그는 로마가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등장하는 과정의 역사를 썼다.
 
폴리비오스의 로마사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것은 40권으로 이루어진 〈역사 Historiae〉로, 그중 마지막 권은 색인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제1~5권이며,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구절이 발췌된 형태로 남아 있다.

역사관
폴리비오스는 '모든 역사가들이 주장했던대로 정치활동을 위한 가장 건전한 교육과 훈련은 역사 연구이며, 운명의 변천을 용감히 견뎌내는 방법을 배우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재난을 돌이켜보는 것'이라고 썼다.

 

"……역사가는 선정주의로 독자를 놀라게 하려고 애써서는 안 되며, 비극 시인들처럼 누군가가 말했음직한 발언을 추적하거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가능한 결과를 망라하려고 애써도 안 되고, 평범하더라도 실제로 일어난 일과 실제로 이루어진 발언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 그쳐야 한다. 역사의 목적은 비극의 목적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비극 작가는 가장 그럴듯한 말로 관중을 일시적으로 전율하게 하고 매혹하려고 애쓰지만 역사가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과 발언을 기록함으로써 모든 시대의 진지한 역사학도를 가르치고 납득시키려고 애쓴다. 비극은 관객을 속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비극에서 중요한 것은 비록 거짓일지라도 있음직한 상황이다. 그러나 역사의 목적은 역사학도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날(BC 220)부터 역사는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었고,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그리스 및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서로 연결되어,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내 저서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오늘날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티케(운명의 여신)는 세계의 거의 모든 일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었고, 그 일들이 동일한 목표를 지향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역사가는 운명의 여신이 전체적인 목적을 달성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독자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동시대인들 가운데 지금까지 아무도 이러한 전반적인 역사서술을 시도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주로 위와 같은 생각이 이 일을 맡도록 나를 자극하고 고무했다"(제1권 4장 1~2절).
여기서 운명의 여신에게 역할을 할당한 것은 그의 역사관에서 볼 때, 약간은 이례적이다. 원인과 결과가 헤아릴 수 없는 변덕스러운 힘에 달려 있다면, 역사가 실용적인 교훈의 원천으로서 갖는 가치는 분명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대개 폴리비오스는 순전한 우연으로부터 의도적인 신의 섭리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현상을 다루기 위해 운명의 여신을 이용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순의 대부분은 그가 순전히 표현상의 기교를 부리거나 운명을 늘 여신으로 표현하는 당시의 헬레니즘 용어를 부주의하게 채택하는 것에서 생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운명의 여신은 로마를 세계의 주인으로 끌어올린 진정한 힘인 것 같다. 로마는 그런 지위에 오를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체로 폴리비오스는 인과관계를 상당히 강조한다. 사건의 원인과 그 직접적인 발단의 구별(제3권 6장)은 그리스의 위대한 역사가 투키디데스보다 더 기계적이고 실제 역사 상황의 변증법적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지만 어떤 점에서는 유용하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56년 - 117년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역사》와 《타키투스의 연대기》는 110년 혹은 114년을 전후로 출판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의 저작은 로마 제국의 쇠망을 한탄하고 공화정 시대의 기풍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는 류가 많다. 또한 자신이 원로원 의원이었으며, 공화정 시대의 전통이 남아있는 원로원이 주도하는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경향이 강했다. 전체적으로 원로원을 중시하고 우대했던 황제들(특히 트라야누스 황제)에게는 높은 평가를, 원로원을 가볍게 보고 원로원과 자주 대립했던 황제들(티베리우스나 도미티아누스)에 대해서는 낮은 평가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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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도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가 짙어져 갔고 1914년 이후에는 그것이 더욱 현저해졌는데, 영국의 저술가들이 역사에서의 우연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나선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였다. 오랜 휴식기를 거친 다음 이러한 주장을 처음으로 들려준 영국의 역사가는 베리였다. 그는 1909년 「역사에서의 다윈주의」라는 논문에서 "우연의 일치라는 요소"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그것이 "사회진화에 있어서, 여러 사건들을 결정짓는 데 크게 역할을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1916년에는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제목으로 다시 이 문제에 대한 독립된 논문을 썼다. H.A.L.피셔는 앞에서 인용한 문장 속에서 역사에 있어서의 "우연한 것과 예견될 수 없는 것의 역할"을 인정하도록 독자에게 간청하고 있지만, 이 역시 1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의 꿈이 깨어지고 난 환멸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자유주의의 좌절이 우연적인 요소에 의한 것이엇다고 생각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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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이 융성과정이 아니라 퇴락과정을 거듭하고 있는 집단이나 국민에서는 우연이나 우발적인 사건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론이 우세하기 마련이다. 시험의 결과란 결국 제비뽑기와 같다는 생각은 언제나 열등생에게 인기가 있지 않을까?

 

"만일 어떤 전투의 우연한 결과와 같은 하나의 특수한 원인이 한 국가를 멸망시켰다면 거기에는 단 한번의 전투로 이 나라를 몰락하게 만든 일반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이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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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세계사에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면 세계사는 매우 신비한 성격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우연은 전반적인 발전경향의 한 부분이 되고, 다른 형태의 우연에 의해서 상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발전의 촉진과 지연은 이러한 '우발적 사건'에 의존하고, 이러한 우발적 사건에는 처음에 운동의 선두에 선 사람들의 '우연한 성격'에 포함된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는 역사에서의 우연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변호하고 있다. 첫째로 우연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건의 과정을을 촉진한다거나 지연시킬 수 있지만 그 사건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경하지는 못한다. 둘째로, 하나의 우연은 다른 우연에 의해서 상쇄되어 결국에 가서는 말소되어 버리고 만다. 셋째로 우연은 특히 개인의 성격 속에 구체화된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은 기막힌 비유를 들어서 우연은 상쇄되고 스스로 말소된다는 이론을 재강조했다.

 

역사의 모든 과정은 역사의 법칙이 우연을 통해 굴절하는 과정이다. 생물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역사의 법칙은 우연의 자연도태를 통해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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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의 우연은 무지의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는 (우연이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마찬가지로 타당하지 않다. 확실히 이러한 일이 이따금씩 일어나기는 한다. 예컨대 planet이란 이름은 말한 것도 없이 방랑자라는 뜻의 그리스어 plan tes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별들의 운동의 규칙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시기에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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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역사란 『역사적 의미라는 관점에서 본 선택과정』이다.

톨콧 파슨스의 말을 다시 한 번 빌리면

역사는 사실에 대한 인식적태도에서뿐 아니라 인과관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선택적인 체계라고 할 수 있다.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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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적 원인은 일반화될 수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독특한 것이므로 교훈도 없고 논리적인 귀결이 없다. 

다른 나라,다른 시대, 다른 조건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즉 유효한 일반화가 가능하게 하는 인과관계는 이해력을 넓히고 심화시키는 목적에 합치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가치판단이 내포될 수 밖에 없고, 가치판단은 주관적인 것이다. 1920년대의 그 위대한 마이네케의 말을 빌리면 "가치와 관련되지 않고 역사의 인과관계를 추구할 수 없다. …… 인과관계 탐구의 밑바탕에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언제나 가치에 대한 탐구가 있다."

마이네케 Friedrich Meinecke 
1862. 10. 30 프로이센 ~ 1954. 2. 6 베를린. 독일의 역사가.
근대 지성사의 태두인 스승 빌헬름 딜타이와 더불어 20세기 전반의 대표적 역사가로 꼽힌다. 슈트라스부르크대학(1901)·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대학(1906)·베를린대학(1914~28)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896년부터 나치 정권에 의해 해임당한 1935년까지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 잡지 〈히스토리셰 차이트슈리프트 Historische Zeitschrift〉 편집장으로 일했다.

 

 

 

 

 

 

 

마이네케의 저서에는 비스마르크와 강력한 국가에 대한 숭배자였다가 과거 독일의 인문주의적 가치를 숭상하는 중도적 자유주의자로 변신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또 〈세계시민주의와 민족국가 Weltbürgertum und Nationalstaat〉(1908)에서는 독일이 18세기의 세계시민주의를 극복하고 19세기에 들어 민족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을 낙관적인 관점에서 추적하고 있다. 〈현대에서의 국가이성의 이념 Idee der Staatsräson in der neueren Geschichte〉(1924)은 권력정치에 대한 입문서인 동시에 비판서이다. 주권국가는 가장 높은 윤리적 가치의 구현체라는 개념과 정치적 필요에 따라서는 도덕규범의 파괴도 정당하다는 식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그 자신도 말려든 권력과 도덕 사이의 모순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독일 지배계급이 파산한 증거로 보았으며, 철저한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 열광적이진 않아도 충실한 옹호자가 되었다.
그의 저서 〈역사주의의 탄생 Die Entstehung des Historismus〉(1936)은 잠바티스타 비코에서 레오폴트 폰 랑케에 이르는 역사주의의 등장을 조명한 책이다. 마이네케는 또한 개개인의 사적 관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 개인을 단지 국가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나치에 대한 분명한 반대 입장을 암시하기도 했다. 또 〈독일의 파국 Die deutsche Katastrophe〉(1946)에서는 프로이센 국가와 같은 존재와 세력이 히틀러와 나치의 바탕을 마련했다고 비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베를린자유대학의 초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말년에는 역사이론의 각종 주제에 관해 수많은 논평을 썼는데, 역사철학 체계를 도식화하려는 시도는 부정했다. 

 

159

여기에 이르고 보니 내 보잘 것 없는 속임수를 털어 놓을 때가 온 듯하다. 여러분은 이미 간파했겠지만, 내가 할 말을 간략하게 줄여 줬기 때문에 용인했을 것이다. 편의상 사용한 '과거와 현재'라는 말 속의 '현재'라는 단어는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관념적인 존재일 뿐이다. 사실 현재란 이미 다른 시간적인 차원인 미래라는 말의 대용품인 것이다. 과거는 미래와 같은 시간적 연장선에 존재하므로, 과거에 대한 관심은 미래에 대한 관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전통이란 과거의 관습과 교훈을 미래에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기록은 순전히 미래의 세대를 위해 보관되는 것이다. 네델란드의 역사가 호이징가는 "역사적 사고란 언제나 목적론적이다."라고 말한다. 찰스 스노 경은 러더퍼드에 관해 "모든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 그도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거의 알지 못한채 미래를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훌륭한 역사가들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미래를 뼛속 깊이 느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가는 "왜?"라는 문제 이외에도 "어디로?"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진보로서의 역사

p167
역사를 해석하겠다는 열망은 너무나 뿌리 깊은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건설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신비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지게 된다. - F. Powicke

p172
"지금까지는 이렇게 살아 본 일은 없었다"는 가두의 서민들의 판단보다 중산지식층의 판단이 왜 옳다는 건지 맥밀란의 말의 근거를 알 수 없다.

해럴드 맥밀런 백작

(Maurice Harold Macmillan, 1st Earl of Stockton, OM, 1894년 2월 10일~1986년 12월 29일)
영국의 정치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보수당 내각의 국방장관, 외무장관, 재정장관을 역임하였고, 1957년 1월부터 1963년 10월까지 총리를 역임했다 

 

 

p174

역사는 획득된 기량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진보를 말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계급없는 사회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할 것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예언은 이런 것들에 비해 논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약점이 덜하지만 역사의 종말을 가정한다는 것은 역사가보다는 신학자에게나 어울리는 종말론적 냄새를 풍기고 있으며, 역사의 밖에 목표를 두는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p176

역사가에게는 진보의 끝은…아직도 끝없이 먼 곳에 있고, 그 지표는 우리들이 전진할 때만 비로소 시야에 들어온다.

 

진보의 시대가 있듯이 퇴보의 시대라는 것도 있다. 게다가 후퇴 후의 전진이 같은 지점에서 같은 방향을 따라 다시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성급하다.

 

내가 만약 역사법칙의 공식화에 열중했다면  어떤 시기에 문명의 발전에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집단이  다음 시기에는 같은 역할을 담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법칙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 집단에는 이전 시기의 전통과 이해와 이데올로기로 깊이 물들어 있어서, 다음 시기의 요구와 조건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당연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p177

마지막으로, 역사적인 의미에서 진보의 본질적 내용은 무엇인가 문제이다. 가령 시민의 권리를 만인에게 확대하려고 싸우는 사람들, 형사소송의 절차를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 인종 또는 부에 따르는 불평등을 제거하자고 싸우는 사람들이  역사법칙이나 가설로서 진보를 실현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 행위에 진보의 가설을 적용하고, 진보라고 해석하는 것은 역사가의 몫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로 말미암아 진보의 개념이 무효로 되지는 않는다. 아이자이어 버린 경은 "진보나 반동이라는 개념은 남용되기는 했지만 공허한 내용은 아니다."라고 말했고 이에 동의한다.

 

p178

오늘날 물질적 자원 및 과학적 지식의 축적이라는 면에서 진보가 보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기술적인 의미에서 환경에 대한 지배력이 증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지만 국내적이든 국제적이든 사회환경의 지배에 과연 진보가 있었는가? 오히려 퇴보한 것은 아닌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진화는 기술의 진보에 비해 숙명적으로 뒤늦게 오지 않는 것인가?

 

p179

19세기 사상가들은 흔히 역사의 진보에는 확실하고 명백한 목표가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러한 생각이 적용불가능하며 무용지물임은 이미 밝혀졌다. 진보란 자동적이고 불가피한 진행과정이 아니라 인간능력의 진보적인 발전을 뜻한다. 진보는 추상적인 용어이다.

 

p180

우리가 그것을 향해 전진할 때에만 비로소 분명해지고,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증명될 수 있는 목표를 향한 무한한 진보 (영원히 추구해야 하는 진보)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이러한 개념이 없다면 사회가 어떻게 지속될 수 있겠는가? 모든 문명사회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세대가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 미래의 보다 나은 세계라는 명분으로 현재의 세대의 희생을 합리화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는 이름 아래 희생을 요구하는 태도와 대조되는 현실적인 합리화라고 할 수 있다. 베리의 말에 "후세에 대한 의무라는 원리는 진보라는 개념으로부터 직접 나온 필연적 귀결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후세에 대한 의무 외에 어떤 정당화의 방법이 있겠는가? 나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나는 역사에서의 객관성이라는 유명한 난문에 부딪친다. 객관성이라는 말 자체부터 오해를 만들어내고 문제투성이이다. 사회과학중에서도 역사학은 주관과 객관을 분리시키고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엄격히 분리하는 인식론과 조화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공평하게 다룰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

 

p181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가 판단하는 중요성에 따라 그 지위를 얻게 되므로, 태생적으로 객관적일 수가 없다. 역사의 객관성이라는 말을 편의에 따라 계속 사용하기로 한다면 사실의 객관성이 아닌 관계의 객관성,  곧 사실과 해석, 과거의 현재 및 미래의 관계의 객관성이라는 의미에 그쳐야 한다.

 

보다 복잡한 차원에서는, 가령 역사가가 어떤 선배의 판단을 논박할 경우, 절대적인 허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불충분하다든가, 일방적이라든가, 오해의 소지가 있다든가, 나중에 발견된 증거에 의해 뒤떨어지고 적합하지 않게 된 관점의 소산이라며 비난한다.

역사가는 절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p182

역사가는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과제에 있어 중요한 것과 우연적인 것을 구분하기 위한 기준(동시에 객관성의 기준이기도 하다)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을 자신이 전망하는 미래의 목적과 관련성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에 대한 진화적 해석은 역사의 필연적 기능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불변의 방식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정은 역사가의 경험과 어긋나는 것이다. 버터필드 교수는 "역사가에게 유일한 절대자는 변화"라고 말한다. 이 경우 그는 아마도 역사가들이 따르지 않아도 될 어떤 영역을 은연중에 자기 몫으로 남겨두고 있을 것이다. 역사에서의 절대자는 우리가 출발해 온 과거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현재에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모든 사고는 상대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p183

우리들의 기준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변함없는, 정적인 의미의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것은 역사의 본질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기준은 과거에 대한 해석이라는 면에서 절대성을 가진다. 어떻게 해석하든 마찬가지라든가, 나름의 시간과 장소에서 다 옳다라는 상대적인 기준은 배척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과거에 대한 해석을 결정해야할 방향성 있는 기준이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들은 과거의 사건에 대한 정리와 해석이 가능하며, 정치가, 경제학자, 사회개혁가는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의 인간의 에너지를 해방하고 조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향감각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게 마련이다.

 

헤겔은 그의 세계정신 절대성에 신비적인 옷을 입혔고, 역사의 과정을 미래 속으로 투사하는 대신 현재에서 끝나게 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는 과거에 대해서는 연속적인 진화의 과정을 인정하면서도 부당하게도 미래에 대해서는 이를 거부했다.

 

토크빌은 당시의 신학적 관용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의 절대적인 기준에 너무나 궁핍한 내용을 부여했지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다. 평등의 발전을 보편적인 영원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평등의 점진적이고 진보적인 발전」을 역사의 과거와 미래로 보게 된다면, 이러한 단 한가지 발견만으로도 이러한 발전에 그들의 주님이자, 지배바의 의지라는 신성한 성격이 부여될 것이다."

 

p186

몰락하고 있는 시대에는 모든 경향이 주관적으로 된다.

반대로 모든 일이 새 시대를 향해 무르익고 있을 때에는 모든 경향은 객관적이다.      - Goethe "만년의 대화"

 

187

역사적 판단의 궁극적인 기준을 미래에서 찾는 이론에 대한 인기 있는 반론이 있다. 성공이야말로 판단의 궁극적인 기준이며, 지금 있는 것은 모두 옳지는 않더라도 앞으로 존재하게 될 무엇이든 다 옳다고 하는 반론이다.

 

p188

"역사가는 승리를 거둔 세력은 앞으로 끌어내고 그들에게 먹혀버린 세력은 뒤로 밀어 제쳐놓아

 현존의 질서에 '불가피성이라는 외관'을 부여한다."     -R.H. Tawney, The Agrarian Problem in the Sixteenth Century.

 

이런 것이야말로 역사가가 하는 일의 본질이다. 대체로 역사가는 승자든 패자든 무엇인가를 성취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

 

"우리들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것은 국가를 형성하는 민족뿐이다." 는 헤겔의 말은 하나의 사회조직에만 배타적인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가증스러운 국가숭배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구분도 이를 반영한다. 어느 정도 사회를 조직하는 데 성공한 민족만이 야만 단계를 넘어서 역사속에 들어오는 것이다.

 

p190

비스마르크는 자기가 다루는 실체를 이해하였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로베스 피에르, 레닌, 히틀러) 추상적인 이론에만 끌려 다녔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아이자이어 경은 말한다. "보편타당성을 요구하는 체계적인 방법이나 원리를 위해서 …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역사에서 판단 기준은 '보편타당성의 원리'가 아니라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p191

정치가는 도덕적 또는 이론적인 면에서 무엇이 바람직한가만 고려해서는 안된다. 현재 어떤 세력이 존재하며, 어떻게 주도되며, 당면목적달성의 가능성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 역사를 해석하는 역사가의 정치적 판단은 이러한 절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타협적 토대는 역사해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역사가 나름의 추상적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과거를 규탄하는 것보다 심한 오류는 없다. 그러나 '성공'이라는 표현은 불쾌한 뉘앙스가 있으므로 '효과적인 것'이라는 중립적인 말로 대체하는 것이 좋다.

 

p192

'효과적인 것'이라는 기준을 삼는다고 적용이 쉬워지거나, 의미가 명확해지거나, 즉각적인 판단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존재하는 것이 모두 정당하다는 견해에 굴복하자는 것도 아니다. 역사상 뜻깊은 실패도 있다. 이른바 '지연된 성공'이다. 오늘날 명백한 실패지만 미래에는 성공에 결정적 기여를 하지도 모른다. 사실, 예언자란 자기 시대에 앞서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부동 보편의 기준이 아니라. '효과적인 것'이라는 다소 탄력적인 개념의 기준이 가지는 장점은 그것이 판단의 연기를 가능하게 해주고, 판단을 수정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프루동은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가 성공한 다음 이 쿠데타를 묵인했다.

 

피에르조제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년 1월 5일 ~ 1865년 1월 19일)


프랑스의 상호주의 철학자이자 언론인이었다.
프루동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프랑스어: anarchiste)라고 칭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프루동은 프랑스 바탕에서 통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9세 때 쥐라 산맥에서 목동이 되었다. 브장송에 있는 중등학교에 다녔으나 경제적 부담으로 대학 입학 시험(바칼로레아)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인쇄소에서 기술을 배우면서 다양한 독서를 할 수 있었고,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독학하였다. 또한 많은 사회주의 지식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1838년 프루동은 장학금을 받아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소유란 무엇인가?》(What Is Property?)에서 소유를 도둑질이라고 규정하였으며 《소유자에 대한 경고》로 인해 재판을 받았으나 석방되었다.

마르크스와의 교류
그는 1843년 자신의 인쇄소를 팔고 수상 운수회사에서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카를 마르크스와 바쿠닌을 알게 되었다. 프루동이 1842년 쓴 《경제적 모순의 체계, 혹은 빈곤의 철학》에 대해, 카를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으로 비판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나빠졌다.

정치활동과 망명
프루동은 1848년 혁명이 일어난 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민중〉(Le Peuple)지에 나폴레옹 3세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3년의 징역과 3,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고 벨기에로 피신했다. 그는 파리에 돌아와 체포되어 생트펠라지 감옥에 투옥되어 1852년 석방됐다.  《혁명가의 고백》과 〈민중의 목소리〉를 썼으나 다시 기소되어 다른 감옥으로 이송된다. 그는 1858년 《혁명과 교회의 정의론》으로 다시 3년의 징역과 4,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아 브뤼셀로 피신하여 이때 레프 톨스토이를 만난다. 1862년 그는 파리로 돌아와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를 썼다. 그는 1865년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사회적 평등 없이는 정치적 평등은 있을 수 없다.
그에게 있어 프랑스 대혁명은 결코 ‘혁명’이 아니며, 그것은 한 인간의 주권(전체주의)에 대신하여 다수의 인간의 주권(민주주의)을 세운 데 지나지 않고, 양자는 모두 타자에 대한 의지의 강제라는 점에서 원리상 아무런 변화도 없으며, 모두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고 했다. 더구나 프랑스 대혁명은 인간 억압의 사회적 기초인 재산제도에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다. 재산은 일체의 악의 근원이며, 따라서 재산의 사회적 평등 없이는 정치적 평등은 있을 수 없다. 프루동은"소유, 재산은 도둑질한 것"이라고 했는데, 법이 권리로 인정하는 재산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사유재산 논박
또한 근대적인 재산제도 밑에서는 첫째로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고용관계가 불평등한 교환의 관계이며, 이 불평등에 의한 이익이 축적됨에 따라, 둘째로 자본가가 분업과 협동에 의한 생산력의 증대를 무상으로 손에 넣음으로써 훔치는 것으로서의 재산은 더욱더 축적되어 간다. 그런데 이것은 기구적(機構的)으로 촉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일체의 부는 수많은 노동자의 협업에서 나오는 ‘집합력’의 소산이므로 집합력이 가령 자본가에 의해 형성되는 경우라도 자본가의 독점에 맡길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귀속시켜야 마땅한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집합력의 소산으로부터 자기의 생명과 자손의 유지에 필요한 부분을 노동과 교환하여 획득할 수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년 4월 20일 ~ 1873년 1월 9일)

최초의 프랑스 대통령, 두 번째 프랑스 황제. 프랑스의 마지막 세습군주,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이자 의붓외손자
1848년에 2월 혁명 이후 수립된 새로운 공화국에서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
쿠데타를 통해 제2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경제 개발에 힘써 농업 국가였던 프랑스를 공업 국가로 탈바꿈시켰고
오스만 남작과 함께 파리 개조 사업을 단행하였다.

 

 

 

 

 

 

 



망명지에서의 어린시절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이자 1806~1810년에 네덜란드 왕을 지낸 루이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였다.
루이 나폴레옹은 어린시절과 청년기를 주로 망명지에서 보냈다.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자 어머니 오르탕스도 보나파르트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추방되었고,
스위스에 자리잡아 1817년 아레넨베르크 성(城)을 사들였다. 낭만적인 성격을 가진 그녀는 어린 루이 나폴레옹에게 나폴레옹 1세의 천재성을 열렬히 찬양하며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었다.루이 나폴레옹은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라틴어 학교를 다닌(1821~23) 뒤,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대통령 시절의 루이 나폴레옹.
1848년 그는 2월 혁명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파리시로 달려갔으나 임시정부는 그를 쫓아냈다. 그러나 지지자 몇 명은 소규모의 보나파르트 당을 조직해 그를 제헌의회 의원 후보로 지명했다. 루이는 새로 창당된 질서당(Parti de l'ordre)의 지원을 받았는데 부르봉 왕가, 루이 필리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우파 정당이었다. 이들은 노련한 정치가는 아니었으나, 대중에게 인기있던 루이를 지지하였다.

그는 제헌의회 의원 선거 때와 같은 대대적인 선전을 벌였다. 옛 황제의 조카라는 혈통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프랑스의 영광스런 추억이 서려 있는 나폴레옹의 전설적인 위업을 환기시키며 평화로웠던 옛 시절을 되찾을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또한 각 계층의 국민들에게 그들의 이익을 모두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여 모든 유권자 집단의 지지를 얻었다. 중간계급과 농민들에게는 '질서'와 '번영'을, 빈곤층에 대해서는 '지원'을 약속했다. 1848년 12월 선거에서 모두 543만 4,226표를 얻었다.

독재체제 확립
대통령이 된 루이 나폴레옹은 1849년 5월 입법의회 선거에서 승리했던 질서당 소속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그가 집권한 새 정부는 원정군을 파견해 교황청이 로마를 되찾도록 도왔다. 한편 프랑스 안에서는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이고 있던 공화파들을 정부요직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활동을 제약했다. 그러나 국민의회에서 루이가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의원들은 고작 12명 정도의 보나파르트 당원들뿐이었다. 그는 헌법이 보장한 권한을 충분히 활용해 조심스럽게 자신의 미약한 세력을 굳게 만들고, 행정부와 군의 요직에 자신의 추종자들을 앉혔다. 10월 31일 처음으로 그는 국민의회보다는 그에게 더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로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고, 전국을 돌며 국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호를 받았다. 또한 그는 1850년 국민의회가 300만 명에 이르는 빈곤층 유권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1851년 경제 상태가 나빠지자, 이를 구실로 정당들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부추겼고, 있지도 않은 혁명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강력한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선전함으로써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쿠데타
당시 프랑스의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는 4년 단임으로 중임할 수 없었다. 그는 헌법개정에 필요한 의원수 3/4의 지지를 얻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12월 2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수천 명이 체포당해 추방되었으며 루이 나폴레옹은 입법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헌법을 공포했다. 새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승인을 받자 자신을 얻은 그는 1852년 11월 또 국민투표를 실시, 그는 프랑스 제2제정의 황제로 인정받았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3세는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에 걸맞은 법과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항상 대중여론에 앞서가려고 했다. 여론을 검토하고 선전을 통해 여론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몹시 신경을 썼다. '자유'를 약속했지만, 경찰 국가의 통치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독재자였다.
그는 공업과 농업발전을 촉진시켰다. 대규모의 기술개발에도 열정을 쏟아 후원했으며 발명가들을 지원했다. 또 개인적으로는 파리를 근대적으로 재건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말한 "가난하지만 부지런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빵값을 낮게 유지시켰고 위생시설을 갖춘 노동자주택 건설을 촉진시켰으며, 중재위원회도 설립했다. 그가 이상으로 삼은 서로 돕는 사회에서는 사용자와 노동자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는 사회복지기관에 자주 기부금을 하사했으며 시민들도 이같은 일을 본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중산 계급은 그를 사회주의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보호자로만 여겼으며 그의 사회적 구상은 이상향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황제로서의 대외 정책
나폴레옹 3세는 국내 정책과 마찬가지로 대외문제에서도 곧바로 주도권을 쥐었다. 그는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의 평판이 나빠지는데도 이를 방치했기 때문에 몰락했다. 나는 뭔가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민족성의 원칙에 따라 "더 지속적이고 공평한 기초 위에 유럽의 세력균형을 재건"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원했고 "만약 다른 국가들이 어떤 것을 얻으면 프랑스도 역시 뭔가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림 전쟁
황제는 크림 전쟁(1854년 3월-1856년 3월)에서의 프랑스의 성공적인 참여를 통하여, 오스만 제국에 영향을 뻗치려 하는 러시아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전쟁 동안 황제는 영국과의 동맹 관계를 수립하였고, 전쟁 후에도 이 동맹 관계는 지속되었다. 러시아의 패배와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승리는 프랑스가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전쟁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처음으로 유럽 열강들 간의 벌어진 충돌이었으며, 반 세기를 유지하고 있던 유럽 국가간의 평화를 붕괴시켰다.
이탈리아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과 힘을 합쳐 오스트리아 제국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려는 전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독일 연방이 개입할 가능성에 놀라 갑작스럽게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느슨한 연방국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통일 이탈리아 건설을 들고 나와 그에게 대항하던 이탈리아의 카보우르 백작의 책략에 말려들어 니스와 사부아를 양도받고 손을 떼기로 했다. 이탈리아에 대한 이런 행동은 영국의 불만을 샀다. 1860년 영국-프랑스 통상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회의적이었으며 특히 프랑스의 군함건조, 식민지와 동양권 국가에 대한 정책을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았다.

프로이센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정책에 호의적이었으므로 프로이센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를 덴마크와 싸워서 해결했을 때도 초연한 자세를 지켰다. 그는 북독일 지역에서 세력을 넓히려는 프로이센의 구상에 항상 동조했다. 그러나 이같은 지원에 대한 대가를 공개적으로 비스마르크에게 요구한 적은 없었다.
1866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황제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오스트리아군을 패배시켰을 때, 그는 프로이센 편에 선 어떤 군사적 개입도 거부했으며, 단순한 중재자로서 역할만 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황제가 중립을 지켰다고 해서 독일 영토를 떼어줄 생각은 없었다. 따라서 그 대가로 벨기에를 얻으려던 그의 계획은 1867년 룩셈부르크를 얻으려던 일과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황제에게는 룩셈부르크 요새에서 프로이센군이 철수한 것만으로는 만족스러운 보상이 못 되었다. 황제는 "비스마르크가 날 속이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황제는 속지 않는다"라며 못마땅해 했고, 이후 비스마르크가 마인 강을 넘어가 남부 독일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려는 것을 방해하였다.

개혁시도
1860년 나폴레옹 3세는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주어도 될 만큼 정권이 충분히 안정되었다고 생각했다. 재정을 늘리고 국민의 생활비를 감소하기 위해 자유무역원칙에 입각한 새로운 경제정책의 첫 번째 조치로 영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의회의 기능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정부의 모든 정책을 세우는 데 더 직접적으로 간여할 거대한 국가체제"를 만들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기대했던 만큼 이뤄지지 않았다. 경제악화로 불만이 쌓인 중간계급과 노동자들은 그의 반(反)교황적인 이탈리아 정책에 분노한 가톨릭교도들과 합세하여 반대세력으로 꾸준히 성장해갔다.1857년 선거에서는 5명의 반대세력만이 국민의회의 의석을 차지했지만 6년 후에는 32명으로 늘어났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68년,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부르봉 왕가는 쫓겨났고, 혁명 지도자들은 프로이센 빌헬름 1세 국왕의 사촌인 레오폴드 공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하였다. 레오폴드 공은 이를 거절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 소식을 듣고 프랑스와의 전쟁의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스페인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빌헬름 1세는 반대했지만, 비스마르크는 1870년 6월 21일에 수락발표를 해버렸다. 프랑스는 이에 반발하여 프로이센 인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철회하라는 문서를 보냈다. 7월 12일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철회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레오폴드 공은 스페인의 왕이 되지 못했고, 스페인에서는 1871년 혁명가 아마데오 1세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7월 2일 프로이센 왕의 친척인 호엔촐레른가의 한 대공이 스페인 왕위계승 후보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프랑스는 이것이 프랑스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 프로이센이 개입한 것이며 안보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고, 나폴레옹 3세는 즐겨 썼던 비밀외교를 통해 호엔촐레른가의 대공이 입후보를 포기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때 이 병약한 프랑스 황제는 호전적인 정책을 지지하는 측근들의 말을 받아들여 프로이센에게 호엔촐레른 가의 스페인 왕위계승문제를 재론하지 말라고 요구하여 굴욕감을 안겨주려 했다. 그결과 7월 19일 전쟁이 터졌다. 전쟁 선포 전인 1870년 7월 7일, 프랑스의 베네데티 대사가 빌헬름 1세의 휴양지인 엠스에 나타나 빌헬름 1세에게 이런 일의 재발 방지를 확실히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다. 빌헬름 1세는 그런 문제는 관심없다며 사실상 거절했다. 나폴레옹 3세는 평화와 프로이센의 항복을 바랐지만, 그랑몽과 파리 시민등 극우파들은 빌헬름 1세의 확실한 보장을 요구하며 실재적 행동을 보일 것을 요구했다. 또한 당시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 공략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시기부터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보다는 빌헬름 1세의 "철회 보장"이 핵심 이슈가 되었다. 그라몽은 서면 보장을 요구하면서 협상 기한을 7월 12일로 하는 최후통첩을 발한다. 동시에 빌헬름 1세는 레오폴드의 에스파냐 왕위 수락을 공식적으로 취소했다. 다음 날인 7월 13일, 베네딕트와 빌헬름 1세가 우연히 회동하는데, 그 내용을 비스마르크가 내용을 왜곡하여 영국 신문에 공개하였다.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가 프랑스에게 스페인 왕위 계승 건에 대한 철회 문서의 내용을 변경하였다. 1870년 7월 14일, 비스마르크가 조작한 내용이 신문에 실렸고, 이는 나폴레옹 3세의 분노를 일으켰다. 프랑스 정부는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했다.
7월 25일 자 런던 타임즈에는 베네데티가 벨기에 병합을 거론한 문서가 공개되었는데, 이 또한 비스마르크가 흘린 것이다.  

나폴레옹 3세는 이를 보고 비스마르크가 전쟁을 원함을 알게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 및 프로이센과 서둘러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다는 조약을 체결했다.
비스마르크는 이 전쟁이 방어 전쟁임을 주장하면서 맞대응을 하였다.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 나폴레옹 3세는 스당 전투에서 싸우다가 결국 9월 2일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다.
파리 시민들은 파리 코뮌을 세우고 계속 독일군에 저항하였으나 4개월 만에 항복하고 만다. 프로이센군은 파리에서 시가행진을 하였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방에서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포한다. 이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아주 굴욕적인 일이었다. 한편, 러시아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1856년에 맺은 해협에 관한 협정을 파기한다. 한편 나폴레옹 3세는 폐위되었고, 1870년 9월 4일 프랑스 제3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포로생활에서 풀려난 후 영국에서 살았다. 그는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 제위에 복귀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방광결석 제거수술을 받은 후 죽었다.

 

 

 

 

비스마르크의 업적은 역사적 판단이라는 문제의 검토에 있어서 훌륭한 출발점을 제공해준다. '효과적인 것'이라는 아이자이어 버린 경의 기준에 찬성하지만 그가 이러한 기준을 매우 단기적인 기한 내에서 적용하고 크게 만족해 하는 것은 당혹스럽다. 비스마르크가 이룩해 놓은 것은 과연 효과적인 것이었는가? 나는 그가 이룩해 놓은 일이 엄청난 재난을 야기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독일제국을 이룩한 비스마르크나, 그 건설을 도운 독일 국민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로서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은 재난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독일 제국의 구조 내부에 어떤 보이지 않는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또는 독일 제국을 탄생시킨 내적 조건에 이기적인 공격성을 띌 숙명이 있었기 때문일까, 또는 독일이 건설되었을때 유럽이나 세계사회가 새로운 침략적 대륙의 출현만으로도 커다란 충돌을 일으키고 조직 전체가 붕괴될 만큼 취약했고, 이미 기존의 대국 사이에 침략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었을까? 마지막 가정에 의한다면 비스마르크와 독일 국민에게 재난 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잘못이다. 최후의 연루자만을 비난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93

여기서 잠깐 눈을 돌려 사실과 가치의 대립을 보기로 하자. 가치를 사실로부터 이끌어 낸다는 말은 반쯤은 맞는 말이다. 가치체계가 얼마나 사실로부터 영향을 받는지는 한 시대 또는 한 국가를 지배하는 가치체계를 검토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도덕적 가치의 보급과 그와 깊은 관련이 있는 제도로서 기독교 교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원시 기독교의 가치와 중세 교황시대, 그리고 19세기 청교도가 보급하는 가치, 그리고 현대 미국 교회의 가치체계를 비교해 보라. 이들의 차이는 단순한 시간적 추이가 아닌 역사적 사실의 차이에 의해 생긴 것이다.

 

p194

가치를 사실로부터 이끌어낼 수 없다는 말은 적어도 일면적이고 오해를 일으키기 쉬운 명제이다. 혹은 이 명제를 뒤집어 보면 사실을 가치로부터 이끌어 낼 수 없다는 말이 되는데 역시 반쯤은 맞는 말이다.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가 던지는 의문과 그로 인해 얻게 되는 해답은 개인적인 가치체계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우리는 가치를 통해 사실에 적응하고, 사실을 우리에게 대입하고, 사실을 제어하여 역사를 진보의 기록으로 다듬는다. 이러한 적응을 극적인 과장을 하여 대립이라고 하거나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역사에서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의 상호의존 및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객관적인 역사가라면 이러한 상호작용을 깊이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p195

사실과 가치 문제에 관한 단서는 진리(truth)라는 말의 일상적 용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리"라는 말은 사실과 가치의 범주에 양다리를 걸치면서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독일어(Warheit)나 러시아어(Pravda)도 모두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모든 언어권에서 진리라는 말에는  단지 사실의 진술이나 단지 가치 판단만이 아닌 두 요소를 포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지난 주에 런던에 갔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지만 진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 어떤 가치적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국부들이 독립선언문에서 만인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명한 진리를 언급했을 때, 여러분은 이 명제의 가치적 요소가 사실적인 부분을 압도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따라서 진리로서 인정받을 만한 권리라는 것에 여러분의 가치 판단이 개입할 것이다. 

 

역사적 진리의은 가치를 떠난 사실이라는 이름의 북극과 사실이 되고자 애쓴느 가치판단이라는 남극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첫번째 강의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역사가란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는 사람이다. 역사가는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를 분리할 수 없다. 정적인 세계에서는 사실과 가치의 분리를 선언할 의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적인 세계에서는 역사는 무의미하다.

 

p196

역사는 본질적으로 변화이고, 운동이며, 진보이다.

 

넓어지는 지평선

 

p203 
나는 역사를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이라고 했고, 또한 역사가도 이 과정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역사및 역사가의 위치에 대한 반성은 불가피한 듯하다.

 

p204
20세기 중엽의 심각하고 가장 광범위한 변화의 두 측면, 깊이의 변화와 지리적 넓이의 변화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부르크하르트에 의하면 역사는 "의식의 각성에 의해 생긴 자연과의 단절"이다. 역사는 인간이 이성을 활용하여 환경을 이해하고,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투쟁의 과정이다. 그러나 현대는 이러한 투쟁을 혁명적 방식으로 확장해 놓았다. 이제 인간은 환경이 아닌 자신마저 이해와 변화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이로 인해 이성과 역사의 새로운 차원이 등장한 것이다. 현대는 어느 시대보다도 역사적 의식이 발달한 시대이다. 현대인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역사를 의식한다. 현대인이 과거를 열심히 살펴 보는 이유는 혹시나 거기서 흘러나온 실마리가 어둠으로 덮힌 미래를 조금이나마 밝혀주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때문이다. 이러한 불안과 열망은 과거에 대한 통찰을 북돋아 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역사라는 쇠사슬에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p205
루소는 인간의 자기 이해 및 자기의식의 새로운 깊이를 파헤치고 자연의 세계와 전통적 문화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토크빌의 말에 의하면 프랑스 혁명을 고무한 것은 "전통적 관습체계를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도출된 단순하고 기초적인 규칙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p206
링컨의 이 말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국가를 형성하고 의식적으로 다른 이들을 국가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미국혁명은 독특한 사건이었다. 인간이 스스로 복종하는 법칙이 아닌 적응할 법칙을 스스로 만들어낼 힘을 충분히 자각하게 된 것이다.

p207
헤겔은 역시 프랑스 혁명의 철학자였으며, 실재의 본질을 역사적 변화와 인간의 자기의식의 발전에서 찾아본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의 발전이란 자유의 개념을 향한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형이상학적 명제에 구체적인 의미를 도입하지 못했다. 헤르첸(Alexandr Ivanovich Herzen: 러시아의 대사상가)는 헤겔의 학설을 '혁명의 대수학'이라고 말했다. 이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혁명적인 이니시어티브에 대응하는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발전하는 법칙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견해로 전환했던 것이다.

p208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것은 객관적 법칙과 이 법칙을 실천에 옮기는 의식적 행위의 종합, 결정론이라고도 불리는 것과 主意主義 (:주지주의(主知主義)에 대립하여 의지가 지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철학상의 입장)의 종합이다. 가령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유명한 테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테제[독일어]: These 정치적ㆍ사회적 운동의 기본 방침이 되는 강령 또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최초의 명제) "철학자들은 오직 세계를 여러가지로 해석해 왔으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의 18일》에서는 "1세기 동안의 과정을 통해 모든 전통적인 관념을 폐기하는 지적 자기의식"이라고 말했다

p209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미 이성의 일차적인 기능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지배하는 객관적 법칙의 이해에 그치지 않고, 의식적 행위에 의한 사회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개조에 이르렀다.

레닌의 경우 '계급'으로부터 '당'으로 강조점이 옮겨진다. 당은 계급의 전위를 이루고 계급 속으로 '계급의식'이라는 불가결의 요소를 주입한다. 이데올로기는 곧 계급의식을 가진 지도자라는 엘리트가 계급의식을 가질 (잠재적 가능성을 가진) 노동대중 속에 심어놓은 신념으로 그 의미가 변했다. 계급의식으 형성은 자동적 과정의 하나가 아닌 의도적으로 시도해야 할 과업이었다.

p210
프로이트는 인간해위의 근원을 좀 더 깊이 이해함으로써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이러한 근원을 의식적으로 변경시킬 수 있는 도구를 마련해 주었다는 의미에서 현대세계에 속하는 사람이다.



p211
프로이트는 사람들이 스스로 믿거나 내세우는 동기에 의해 행동이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낡은 환상의 棺에 마지막 못질을 했다.

정신분석의 방법은 진찰받는 환자에 대한 반대신문에 의거하는데, 죽은 사람에게 반대신문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역사상 위인의 행동을 정신분석의 방법으로 해명할 수 있다는 일부 광신자들의 주장은 허구이다.



p212
1930년대에 들어서 사람들은 벌써부터 '경제적 인간의 종말'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경제적 인간'이란 경제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을 말한다. 립 벤 윙클 (Rip Van Washington Irving의 작품 'The Sketchbook"에 나오는 인물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그려졌다.)같은 인물을 제외하고는 경제법칙을 믿지 않게되었다.

p213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사회혁명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유럽정신의 지배적인 조류였다. 이러한 믿음은 자유를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던 믿음과 대치되었다. …… 오늘날 이러한 믿음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은 프랑스 혁명 당시의 인권에 대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뜻깊고 유익한 일이다.
- S. Leathes 『Cambridge Modern History xii (1910)』

p215
이성의 확대라는 이러한 현상(합리적인 노력으로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면에서 인간의 능력을 통제하련는 의식이 고양되는 현상)은 앞서 말한 개인화라고 부르는 과정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p218
호소는 우선 이성을 겨냥하지 않는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지성보다 낮은 것을 노린다"는 방법이 주로 활용되는 것이다. 위험을 과소평가한다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나는 이러한 실정을 약간 과장했다. 그러나 크게 보면 사실이고 다른 분야에도 쉽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p219
대중선전의 기술과 가능성에 관해서 우리들이 얻은 지식을 되돌릴 수는 없다. 말이나 마차의 시대, 혹은 자유방임의 자본주의 초기로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부분적으로 19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실현되었던 로크나 자유주의자들이 이론화한 소규모의개인주의적 민주정치로 다시 돌아가는 일도 불가능하다.

현대사회에서 확대된 이성의 역할 부정하는 것은 구제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철두철미 인식하는 데 구제책이 있는 것이다. 역사상 다른 위대한 전진이 그랬던 것처럼 이 역시 치러야 할 희생과 손실, 직면해야 할 위험이 있다.

p220
제 1차 세계대전은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전쟁이 아니라 유럽(유럽이라는 실체의 존재를 가정한다면)의 내란이었으나 세계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에는 아시아 여러나라에서 공업발전을 촉진하고, 중국에서 배타적인 감정을 자극하고, 아랍 민족주의의 탄생을 자극한 것도 포함될 수 있다. 

p221
내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영국의 지배 집단의 태도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진보의 행진과 같은 발전을 맹목적인 것으로 보거나 몰이해한 시선으로 보는가 하면 불신에 찬 경멸 아니면, 애교섞인 겸손으로 대하며 동요하는 태도를 보이며 과거에 대한 뼈저린 향수에 잠겨 있는 것이다. 내가 20세기 혁명에서 이성의 확대라고 말한 것은 역사가에게는 특별한 결과를 초래했다. 왜냐하면 이성의 확대는 본질적으로는 지금까지 역사의 외부에 머무르고 있던 집단, 계급, 국민, 대륙이 지금까지 역사의 내부에 등장하게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p222
19세기에 이르러 영국 역사가들은 확신이 없는 산발적인 발걸음으로나마 전국민사회의 역사라는 역사관을 세우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p223
J.R.그린 (John Richard Green: 영국의 역사가)은 평범한 역사가였지만 최초의 『영국민중사』를 써서 명성을 얻었다.

이보다 나는 영국과 역사의 지평선은 서구를 넘어서서 확대되고 있는데 영국의 역사가들은 이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다. 액턴은 1896년 보고서에서 "세계사는 모든나라의 역사를 합쳐놓은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다.

"그것은 여러 국가가 부차적인 위치에 놓이는 연속 과정 속에서 움직인다. 물론 그들 나라의 이야기들도 다루어지겠지만, 그것은 그 나라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연속성에 대한 관련성과 종속관계에 있어서, 여러나라들이 인류 공동의 복지에 이바지한 시기와 정도에 따라 이야기될 것이다."

p224
그러나 여기에서 또 다른 위험성이 수반되었는데, 그것은 우리들의 교과 과목을 영구소유권처럼 압박해 오던 영국사의 지역주의가 보다 음성적이고 마찬가지로 위험한 영어사용세계라는 지역주의에 의해 보강되었다는 사실이다.

전통과 영예에 빛나는 옥스포드의 철학 전공자들이 평이한 일상요어만으로도 잘 해낼 수 있다는 결론을 가지게 되었을때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학위시험의 수험자가 유럽대륙의 영국 외의 어떤나라의 근대사를 교과서 수준 이상으로 연구하려 할 때, 대학에서 아무런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지금은 '유럽의 확대'라는 19세기식 거창한 허세를 앞세운 논제를 놓고 이에 관한 지식을 피력할 기회란 매우 제한되어 있다.

p225
지난 10년간 캠브리지가 내놓은 역사저장 중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앞으로 평가받을 만한 작품은 역사학과 밖에서 역사학자의 도움 없이 생화학자인 니덤 박사에 의해 쓰여진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다.

나는 첫번째 강연의 서두에서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중엽을 가르는 명백한 관점의 차이를 가지고 주위를 환기한 바 있다. 이제 결론에 이르러서 이러한 대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p226
근대사 강좌에서 그(액턴)는 "근대가 진보해 나가는 방법은 혁명이었다"고 말하고 우리들이 혁명이라고 부르는 일반적 사상의 출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역사에 있어서 점진주의에 반대하고 있다.) 액턴이 살아있을 당시, "자유주의"는 사회변혁의 원동력으로서의 힘을 아직 잃지 않고 있었다. 물론 오늘날 "자유주의"의 잔재는 반대로 사회에서 보수적 요소가 되고 있지만…

따라서 액턴에게로 도달하자고 力說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p227
그러나 그(액턴)의 세대는 오늘날에도 절실히 요청되는 두가지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곧 변화를 역사의 발전적 요소로 보는 감각과 이성은 변화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길잡이로 보는 믿음이다.

그(루이스 네이미어경)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이 추구되고 있을 뿐, 오늘날 양 정당은  정강이나 이념을 잊고 있다고 말하고 이것을 국민적 성숙의 조짐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철저한 경험론의 형태를 갖는 위와 같은 보수주의의 낯익은 표현은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다.

 

 

경험론

 

철학에서 경험론(經驗論, 영어: empiricism)이란 감각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증거들로부터 비롯된 지식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경험론은 인식론으로 알려진 인간의 지식에 관한 학문들 중 가장 널리 퍼진 관점이기도 하다. 경험론에서는 관념의 형성 과정에서 생득관념이나 관습보다는 경험과 증거, 특히 감각에 의한 지각을 강조한다. 같은 맥락에서, 과학철학에서의 경험론은 증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과학적인 지식들, 특히 실험에 그 토대를 두고 있는 관점들을 강조한다. 이는 모든 가설과 이론들은 오로지 연역적인 추론이나 직관, 또는 계시 자연계에서의 기존의 관찰에 반(反)하여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과학적 방법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과학은 완전히 방법론적으로 실증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의 경험론을 창시한 존 로크.

 

 

 

 

 

 

경험론과 철학 
경험론이 담는 원칙은 17세기 존 로크에 의해 명쾌하게 표현되었다. 존 로크에 따르면 마음은 타불라 라사(그는 '백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와 같아서 경험이 이 위에 흔적을 남기고 간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경험론은 인간의 생득관념이라든지 경험을 참조하지 않고 알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부정한다. 경험론자의 관점에 의하면 그 어떤 지식도 적절히 추론되거나 유추되려면, 궁극적으로 누군가의 감각에 기초한 경험으로부터 얻어져야 한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철학적인 경험론은 일반적으로 많은 지식들이 감각과는 독립적으로 이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강조하는 합리주의와 배치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대조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와 같은 많은 합리주의자들이 동시에 경험에 기초한 "과학적인 방법"의 옹호자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들 이론이 포함하는 개념들을 과도하게 단순화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더 나아가, 로크는 신의 존재와 같은 것의 지식과 같은 몇몇 지식들은 직관과 추론만으로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경험론과 과학
종종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양 과학과 결합되어 사용되는 경험적이라는 형용사는 관찰과 실험을 사용하여(즉, 결국 경험을 통하여) 가설을 반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p228

"급진주의자들이 승리에의 확신을 구가할 때, 현명한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이 콧등을 내려 갈긴다" - 트레보 로퍼

"정치적 분야에서 끝도 없고 깊이도 없는 바다를 향해 가고 있다. 다만 우리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은 가라앉지 않고 평탄히 떠 있는 것 뿐이다"

- 오크쇼트 (Oakshott)

 

p229

'단편적 사회공학'이라는 것에 대한  포퍼 교수의 정의는 매우 정확하지만 '목적'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점과 그가 정당한 활동으로 들고 있는 신중한 예들 ( 입헌적개헌이나 소득을 더욱 균등화하려는 경향 )을 보면 그것은 기존사회를 전제하고 그 범위안에서만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혁명 = 자유주의 = 사상의 지배 라는 등식을 제안했을 때의 액턴의 '이성'과는 다르다.

 

p230

주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변화에 관한 피상적인 화제가 흔히 오가기 때문에 이러한 말은 逆說的으로 들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에 와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이 변화라는 말이 성취나 기회, 진보라는 의미가 아닌 공포의 대상으로만 생각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Review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1. 서론

카는 언제나 이론과 실제, 이상과 현실의 양 극단을 거부하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것이 국제 정치 질서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 '도덕적 합의'와 더불어 '힘'의 요소에 대한 강조로 나타났으며, 역사 인식에 있어서는 '과거와 미래', '사실과 해석' '결정론과 자유의지' '객관과 주관'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나타났다.

 

2. 러시아 혁명의 파악

19세기를 크게 수정하고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에 러시아 혁명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러시아 혁명은 프랑스 혁명의 연속이요, 절정으로 볼 수 도 있지만, 세계사는 프랑스 혁명의 시대와 러시아 혁명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러시아 혁명은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카에 의하면 레닌의 등장은 현대사로의 완전한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혁명이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카는 소비에트러시아혁명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917년 혁명은 정치적 행동에 의하여 조직된 경제적 통제수단을 통해서 사회정의를 확립하려던 역사상 최초혁명이었다."

"세계를 뒤흔드는 변화 과정의 표현인 동시에 종종 그 출발점이기도 한 사건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비교적 근래에 본류로 합류한 지류로서 본류의 유량을 불려 더욱 격하게 하였으나, 진로를 크게 수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흐름의 방향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러시아혁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19세기 중엽부터 우리가 통과하기 시작하였던과는 다른 풍경과 기회속에서 그것과는 사뭇 다른 바다를 항해하고 있을 것이다."

 

3. 진보의 사관

 

4. 상대주의 사관

 

5. 결론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미래를 꿈꾸는 나와

과거의 영원한 대화.

 

 

다른 번역판으로 다시 한번 접해보고 싶다.

"지교철 옮김 아름다운날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