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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 읽고 있습니다만.../천천히 읽는 도킨스 (GOD DELUSION ) 주석

천천히 읽는 도킨스 (GOD DELUSION ) 주석 EP 1

by 다리디리다라두 2023. 3. 1.

1. 대단히 종교적인 불신자


'믿음'을 믿다.


p.23


따라서 자연의 전쟁 다시 말해, 기근과 죽음이 있은 뒤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대상, 즉 더 고등한 동물들이 곧잘 생겨난다. 원래 극소수의, 또는 하나의 형상에 몇가지 능력과 함께 숨결이 불어 넣어졌고, 그 뒤 이 행성이 정해진 중력 법칙에 따라 자전과 공전이 반복하는 동안에 그토록 단순했던 것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이로운 무수한 현상들이 진화해왔고, 지금도 그들은 진화하고 있는 이런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담겨 있다.

따라서 자연의 전쟁 다시 말해, 기근과 죽음이 있은 뒤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대상, 즉 더 고등한 동물들이 곧잘 생겨난다. 원래 극소수의, 또는 하나의 형상에 몇가지 능력과 함께 숨결이 불어 넣어졌고, 그 뒤 이 행성이 정해진 중력 법칙에 따라 자전과 공전이 반복하는 동안에 그토록 단순했던 것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이로운 무수한 현상들이 진화해왔고, 지금도 그들은 진화하고 있는 이런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담겨 있다.

공룡의 멸종 뒤에 인간(인간만이 궁극적인 진화의 산물이라는 견해는 아니지만)이라는 종이 번성한 것과 같은 예를 말하는 것인지 불명확하다.

결국은 통틀어 진화론와 자연선택설이 이런 생명관이라는 것이 말하는 것의 요지가 아닌가 짐작해본다. 이는 차후에 원서를 통해서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칼 에드워드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년 11월 9일 ~ 1996년 12월 20일)은 미국의 천문학자, 천체화학자, 작가이자 천문학, 천체물리학, 그외 자연과학들을 대중화하는 데 힘쓴 대중화 운동가이다. 세이건은 외계생물학의 선구자였으며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 계획의 후원자였으며 미국 항공우주국의 자문위원으로도 참가했다.

생애 동안 세이건은 매리너 계획 참가, 하버드 대학교 강사, 코넬 대학교 교수, 파이어니어 계획 참가, 바이킹 계획 참가, 행성연구소 소장, 칼텍 초빙연구원 등의 다채로운 경력을 가졌다. 또한 냉전 말기에는 핵겨울 이론을 통해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기도 했다.

세이건은 과학 대중서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60여 개국 5억여 명이 시청하였고 에미상과 피버디 상을 수상한 1980년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시리즈 《코스모스》(Cosmos: A Personal Voyage)의 제작자이자 공저자로도 명성을 얻었다. 《코스모스》는 다큐멘터리와 함께 책으로도 나왔는데, 이 책은 휴고상을 수상했다. 또한 세이건은 1997년 개봉된 동명의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 《콘택트》(Contact)도 썼다. 일생동안 세이건은 600편 이상의 과학 논문과 대중 기사를 작성했고, 작가·공저자·편집자 등의 자격으로 20권 이상의 책들에 참여했다. 세이건은 자신의 연구와 작품들에서 지속적으로 세속적 인간주의, 과학적 방법, 회의주의를 주장했다.

칼 세이건은 1934년 11월 9일,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세이건은 어렸을 때부터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부모에게서 처음으로 도서관 카드를 받은 세이건은 85번가의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별(stars)에 관한 책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사서는 클라크 게이블, 진 할로 등의 사람들의 사진이 실린 그림책을 가져왔고, 그는 항의를 한 뒤 올바른 책을 받았다. 어린 세이건은 우주의 거대함과 인간의 하찮음에 놀라워했으며, 이때부터 천문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졸업식이 가까워지고 세이건은 대학을 알아보았다. 점수는 좋았으나 월반한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졸업 당시 나이가 겨우 16살이었다. 대학들은 이렇게 어린 학생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여러 상황을 따져본 뒤, 입학 연령 제한이 없고, 여키스 천문대를 소유하고 있는 시카고 대학교에 진학하기로 하고 시카고에 정착했다.
세이건은 가장 유명한 불가지론자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이에 대한 그의 태도는 '무신론자가 될려면 제가 지금 아는 지식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데에서 알수있다. 그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존재로써의 신에 대해서는 여러번 회의적인 의견을 제시했지만, 우주를 창조한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좀 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와 같은 존재를 완전히 부정할려면 우주에게 시작은 없었다는 확고한 증거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세이건의 어머니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이고 아버지는 불가지론자였는데,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 교육을 받았고 보수적인 토라 회당에도 다녔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런 종교 교육을 지루해했고 모든 신앙에 회의적 태도를 보였다.


p.24

주요 종교가 과학을 보면서 '과학 쪽이 우리 종교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 것 같애!" 우주는 과거 우리의 예언자들이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원대하고 미묘하고 더 우아하다구"라는 결론을 내릴 용기가 있을까? 

 

그보다는 그들은 "아냐, 이건 절대 아니라구, 나의 신은 소박한 신이며, 지금 이 상태가 훨씬 더 좋아"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과학이 보여주는 장엄한 우주는 오래된 기존 신앙, 아니 새로운 종교도 손대지 못했던 차원의 우주에 대한 존경과 경이를 보여주는 듯 하다. 


세이건의 책들은 대부분, 지난 오랜 세월동안 종교가 독점했던 초월적인 '경이로움'이라는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그 영향을 받아, 내 책들도 그런 경향을 보여준다. 그로 인해, 나 자신을 대단히 종교적인 인물로 묘사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스티븐 와인버그는 미국의 물리학자이다. 그는 1979년 압두스 살람과 셸던 글래쇼와 함께, 표준 모형의 바탕을 이루는 전자기력과 약한 상호작용을 통합하는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p.25


일부 사람들은 신에 대한 아주 폭넓고 유연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제멋대로 어디에서든 신을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들은 "신은 궁극자다." "신은 우리의 더 나은 본성이다.", "신은 우주다."라는 얘기를 늘어 놓는다. 물론 다른 모든 말들처럼 신이라는 말에도 무슨 의미든 같다 붙일 수는 있겠지, 예를 들면 "신은 에너지다"라고 말하고 석탄더미에서 신을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종종 신이라는 말을 쓰면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무신론적 과학자는 사실 많다) 종교인들(유명한 과학자들이 자신의 편이기를 바라는)의 오해를 자초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자신의 피조물을 심판하는 신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에 "신"이라는 단어가 쓰였다고 해서 그가 유신론적인 가치관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의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는 "그제서야 우리는 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극적인(혹은 장난기 어린?)말로 책의 끝을 맺음으로써 대단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사람들은 그 구절을 읽고서, 물론 잘못된 생각이지만 호킹이 종교적이라고 믿게 된다.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는 스티븐 호킹에 의해 쓰여진 저명한 과학책으로 1988년 벤탐 델 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책이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로 9백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또한 런던 선데이 타임즈에 베스트셀러로 4년 이상 랭크되었다.
<시간의 역사>는 갈릴레이, 뉴턴, 아인슈타인 등의 과거 과학자들의 우주에 대한 연구 내용을 핵심적으로 짚어주고, 우주가 대폭발에서 시작했다는 빅뱅 이론, 블랙홀과 특이점에 대한 내용, 우주의 역사를 통해 우주의 미래와 종말을 전망한다.
이 책을 통해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을 하게 만들었다. 지구에서만 적용되는 물리적인 법칙이 깨지거나 변화하는 우주 다른 공간에서는 우리가 쓰는 '시간'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짐을 말해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주에 대해 많은 괴로움을 겪었다.


그 시작은 학창시절 물리시간에 우주에 대해 배운 후부터였다.


스무살 무렵 캠핑을 가서 슬리핑백에 누워 콜로라도의 밤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오리온이나 큰곰 자리를 찾아볼 생각을 하기도 전에 공포에 휩싸였다. 그 공포는 너무나 극심해서 나는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을 정도였다.


'내가 지금 보고있는 수많은 별은 그만큼이나 수많은 은하 중 한 은하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우주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광대한 공간에 수 천 억개의 은하가 있으며, 그들 개개의 은하 속에는 대략 1천 억 개의 별이 있다.'
'별들은 죽어가고 폭발하고 점점 더 커지고 다시 폭발함으로써 엄청난 온도와 압력하에서 원자를 분열시키고 핵융합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의 태양도 소멸될 것이다. 태양이 소멸될 무렵의 가공할 열은 지구를 잿더미로 만들고, 산산조각난 지구파편은 만곡진 시공연속체의 차가운 허공 속으로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밤하늘은 무너졌다.

나는 다시는 밤하늘을 쳐다볼 수 없으리라.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절망한 청춘의 길고 느린 흐느낌이었다.


그후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의 "우주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수록 점점 더 무의미하게 생각된다'는 유명한 말을 접했을 때 그 허무주의가 다시금 가슴에 사무쳤다. 저 광할한 우주나 극도로 미세한 원자의 깊은 속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공허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거의 그와 동시에 나는 무한대와 무한소 속에 숨어있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한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요컨대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그 모든 것의 명백한 무의미를 피할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휴 로프팅 (Hugh John Lofting)


1886년 1월 14일 영국 버크셔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예수회에서 교육받았고 1912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MIT를 졸업했다. 세계 1차 대전 때 아일랜드군으로 복무하기 전까지 엔지니어로 각지를 여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사상군마(死傷軍馬)에 대한 동정심이 계기가 되어서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의사 둘리틀 선생을 주인공으로 한 《The Story of Doctor Dolittle》(1920)를 발표하고 문필생활을 시작했다. 《The Voyages of Dr. Dolittle》(1922)로 1923년도 제1회 뉴베리상(賞)을 수상하였다.


풍부한 재치와 매력이 가득 찬 사랑스러운 둘리틀 선생님과 그의 식구들은 많은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아
그 후 12권의 책으로 계속 출간되었다.

 

전쟁 중에 심한 부상을 입고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 코네티컷으로 이주했다. 그는 세 번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1947.9.26일 61세의 일기로 California에 잠들었다.

 

의사 둘리틀은 친절하지만 정신은 좀 산만한 천재로서 동물들과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그는 푸들비라는 시골에서 폴리네시아 라는 앵무새,가정부 노릇을 하는 오리,돼지 등 여러 동물들과 살고 있다. 집 안에 동물들이 가득 차 있어 찾아오는 환자도 없는 둘리틀 박사는 늘 돈에 쪼들리면서도 전 세계를 여행하곤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동물들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에 그는 번번히 곤경에 처하고 하는데....

 

원래 이 이야기는 1차 세계대전중 전쟁터에 있던 작가가 집에 있는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 형식으로 씌여진 이야기로서 늘 마법적인 것과 엉뚱한 것이 뒤섞여 나오는 이야기에 끌리는 어린이들의 관심을 사로잡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과 끝없는 관용에 대한 둘리틀 박사의 주장 또한 시사하는 바가 많다.

 

길버트 화이트
이 ' 초상화 '는 현재 진품이 아니다 것이 일반적인 정설입니다.
출생 : 1720년 7월 18일 셀본 , 햄프셔
사망 : 1793년 6월 26일 (72 세 ) 셀본 , 햄프셔

 

오리 엘 대학, 옥스포드에서 수학, 존 레이 , 윌리엄 더햄 의 ' 물리 신학 '의 영향을 받았다. " 목사 - 자연주의 " 이자, 선구적인 자연주의적 생태학자 였으며 최고의 Selborne지역의 자연사 및 고대유물에 관한 최고 권위자였다.

 

화이트 는 영국 최초의 생태학자로 , 자연 에 대한 존중에 있어서 시대를 초월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지렁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지렁이 는 , 비록 외관은 작고 먹이사슬에서 비천한 위치에 있지만, 그들이 없다면 자연한 엄청난 틈이 생길 것입니다. 그들은 식물 성장의 훌륭한 촉진제이며, 그들이 없다면 식물의 성장에 참담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무신론 : 아주 짧은 입문서 줄리언 배기니(Julian Baggini)

 

p.27

인간의 사유와 감정은 뇌 속의 물리적 실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대단히 복잡한 상호 연결을 통해 출현한다. 이런 철학적 자연학자라는 의미의 무신론자는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세계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관찰 가능한 우주의 배후에 숨어있는 초자연적인 지성은 없다고, 몸보다 오래 사는 영혼은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오직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 현상들이라는 의미로만  초자연적인 현상을 바라본다. 현재 자연계 너머에 놓여 있는 듯이 보이는 무엇인가가 아직 이해되지 않은 현상일 뿐이라면, 우리는 결국에는 그것을 이해하고 자연계 내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우리가 무지개의 신비를 푼다고 해도 그 경이감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사유와 감정은 뇌의 대단히 복잡한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연학자의 관점으로 본 무신론의 철학적 의미는 이러한 자연의 경이로움 너머에 초자연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관찰 가능한 자연과 우주를 초월해서 배후에 숨어있는 초자연적인 지성은 없으며, 몸보다 오래 사는 영혼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초자연적인 것은 오직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 현상들이라는 의미일뿐이다. 현재 자연계 너머에 놓여 있는 듯이 보이는 무엇인가가 아직 이해되지 않은 현상일 뿐이라면, 결국에는 그것을 이해하고 자연계 내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설령 무지개의 신비를 푼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경이로움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마틴 리스 (Martin Rees) : 천체 물리학자 영국 왕실 천문학자, 왕립학회 회장
그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Templeton Prize)의 올해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영·미 과학계가 논쟁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로버트 윈스턴 (Robert winston)

 

인간생식 연구에 있어 세계적인 권위자이자 '인간의 마음 Human Mind'과 '인간의 몸 Human Body' 같은 훌륭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의 작가이기도 하다.

 

학문적 연구와 과학 대중화 작업 외에도 과학의 윤리적 문제를 사회 이슈화하는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영국 상원의 과학기술위원회 의작을 역임했으며, 현재 런던에 있는 임페리얼 칼리지의 교수와 해머스미스 병원의 산과의로 재직하고 있다.

 

대니얼 데닛

 

1969년 첫 책 [내용과 의식Content and Consciousness]을 시작으로 [브레인스톰Brainstorms], [행동의 여지Elbow Room], [지향적 자세The Intentional Stance], [마음의 진화Kinds of Minds], [자유는 진화한다Freedom Evolves], [다윈의 위험한 생각Darwin’s Dangerous Idea] 등의 저서를 통해 마음 연구의 지평을 넓혔으며, 그 외에도 수백 편의 논문과 기고문을 발표했다.

 

수백 년 동안 철학자들의 논쟁거리가 되어왔던 의식의 본질이라는 문제에서, 마음(Mind)은 오로지 뇌의 작용과 관련해서만 설명할 수 있다는 유물론적 관점을 주장하였다. 철학 이외에 인공지능과 신경과학 및 인지심리학 분야에도 정통하며, 마음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과학이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해야 생산적이라고 확신했다.철학자인 동시에 과학과 공학, 종교를 넘나드는 다양한 연구로 이름 높으며, 영역을 뛰어넘는 폭넓은 관심과 깊이 있는 연구로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브라이츠 운동 (Brights movement)의 지지자로, 미국 세속주의 연대 자문위원회Secular Coalition for America Advisory Board의 멤버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샘 해리스Sam Harris,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와 함께 ‘신新무신론 4인의 기수’ 중 한 명으로 불린다.

 

맥스 재머 (Max Jammer)

 

1915년 4월 13일 베를린에서 출생, 2010년 12월 18일 사망했다. " 모세 재머 " 로 알려진 , 이스라엘의 물리학 자 및 물리학의 철학자.

 

잼머는 먼저 비엔나 대학 에서 물리학을 수학하고 그리고 1935년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에서 수학, 1942년년에 실험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2차대전의 나머지 기간 동안 영국 육군 에서 복무 한 후 , 히브리 대학으로 복귀하여 1952년 하버드로 옮기기 전까지 히브리 대학에서 역사학과 과학철학을 가르쳤다. 당시 그는 프린스톤 대학교에서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친밀한 동료가 되었다. 잼머는 하버드, 오클라호마, 보스턴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1956년 설립된 이스라엘 바일란 대학교의 물리학과에서 교수가 되었고, 후에 학장과 총장까지 역임한다. 그는 또한 텔아비브 대학의 과학철학 연구소의 공동 설립자이며, 이스라엘 과학 발전 협회의 의장에 취임한다. 취리히에서는 스위스연합 기술연구소의 초대교수였으며, 괴팅겐 대학, 푸앵카레 재단, 콜롬비아 대학, 워싱턴 소재 미국 카톨릭 대학교, 미국과 캐나다의 여러 대학에서 방문 교수 활동을 지속했다.

 

Deism , 理神論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사상.

성서를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계시(啓示)를 부정하거나 그 역할을 현저히 후퇴시켜서 그리스도교의 신앙 내용을 오로지 이성적인 진리에 한정시킨 합리주의 신학의 종교관이다. 먼저 영국에서 1696년 J.톨런드와 M.틴들이 주장하였고, 이어 프랑스에 이입되어 볼테르와 D.디드로 그리고 J.루소 등이 제창하여 유럽 각지에 퍼졌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 뒤에는 직접 세계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이신론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영국 이신론에는 해당되지 않으며, 반(反)그리스도교적이라는 특징도 프랑스 이신론에만 해당되는데, 루소는 예외이다. 또한 영국 이신론의 시조로서는 17세기의 철학자 E.허버트를 강조하기도 하나, 직접 영향을 끼친 J.로크가 더욱 타당하다. 허버트의 이론은 반(反)이성적인 것을 부정하고 초(超)이성적인 것을 인정한 로크보다 진일보한 것이다.
                                                                                                                            - 두산백과, 두산백과


신(神)을 세계의 창조자로 인정하지만, 이를 세상 일에 관여하거나 계시(啓示)하는 인격적인 존재로는 인정하지 않고, 기적 또는 계시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성적(理性的)인 종교관. 라틴어 deus(신)에서 온 말이다.
이신론은 기독교 신학과는 대립적으로 계시신앙에 기초하지 않으며, 이론적·과학적 신 해명을 추구한다. 이와 같은 신앙의 추종자를 이신론자(deist) 또는 자연신론자라고 한다. 콜린즈(J.A. Collins)의 《자유사색 논고》(A Discourse on Free Thinking) 속에서 이들은 주로 자유사상가라고 칭하여졌다. 영국의 톨랜드(J. Toland)·틴달(M. Tindal)·샤프츠버리(E of Shaftsbury),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e)·루소(J.J. Rousseau), 독일의 라이마루스(H.S. Reimarus)·레싱(G.E. Lessing) 등이 대표자들이다.
                                                                                                                            - 교육학용어사전




인간의 공과에 대해서 상벌을 가해서 널리 만물의 섭리를 지배한다는 인격신에 대한 신앙에 대해서, 천지창조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창조행위 후에는 인간세계에 대한 자의적 개입을 중지하고, 자연에 내재하는 합리적 법에 의해서만 우주를 통치하는 것으로서의 신에 대한 신앙을 의미하는 용어. 자연 종교(natural religion)라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유럽사상 중에서 17세기 후반의 영국 명예혁명으로 시작되는 시민사회의 발전과 자연과학의 흥기에 따라서 합리적인 사변의 침투에 의해서 종래의 전통적 국교의 교의를 부인하고, 삼위일체나 계시ㆍ기적을 부정하고 성서의 상징적ㆍ비유적 해석을 채용하는 이단으로서의 신학을 가리킨다.                                                                                       
                                                                                                                          - 종교학대사전

 

 

최초 17세기의 철학자 챠베리의 허버트에 의해 정식화되어 샤프츠베리에 의해서 광신의 배격과 비판의 논거로서 이용되었는데, 이 시기 종교상의 교의의 비판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며, 한 시대 전의 종교적 열광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종교상의 무관심이 관용의 사회적 기반을 만들었지만, 역으로 일응의 사회적 자유를 얻어서 만족한 시민층의 보수적인 상식 도덕이 그들 사이에 극단적인 합리주의에 대한 반발을 낳은 것이나, 이신론자측의 사변의 불철저함이나 피상함이 기존의 국교회파 체제를 유지하는 유리한 사회적 특권과 함께 이신론자측의 입장을 약체화하고, 영국에서는 결국 사상의 주류가 되지 못하였는데, 따라서 후세에 대한 영속적인 영향을 남기지 못했다.

볼테르의 표어로서 널리 알려진 <파렴치한을 없애자>와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꼭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라는 두 개의 말은 한편으로는 편협하며 억압적인 가톨릭 교회의 미신과, 그리고 한편으로는 파렴치한 무신론에 대해서 그가 취한 양면작전의 입장을 명쾌히 나타내고 있다.


폴 데이비스
(Paul Charles William Davies)  
출생 1946.4.22
영국 런던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8년 동안 수학 교수로 재직한 바 있으며 현재 뉴캐슬 대학원 이론물리학과 교수로 있다. 기초물리학과 우주과학을 두루 섭렵한 그는 획기적인 저서들을 잇달아 발표해 과학 대중화의 기수로서 명성을 얻었다. 여러 과학 잡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으며 방송에도 출연해 과학 해설자로 활약하고 있다.

지은책으로 <다른 세계들 – 달아나고 있는 우주>, <무한의 가장자리>, <초력> 등이 있다. 각광 받는 물리학자이자 우주학자인 폴 데이비스는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의 비욘드(Beyond) 연구소를 이끌며 과학의 근본 개념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템플턴상과 영국 왕립협회가 수여하는 패러데이상을 비롯하여 많은 상을 받았다. 한편 소행성 1992OG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폴데이비스라는 공식 명칭이 붙여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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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모든 것을 이긴다.

 

이슬람교 [Islam] = 수니파 [Sunni]와 시아파 [Shi'a]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분파가 300개 이상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 또한 그에 못지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기독교보다는 적겠지만 여하튼 우리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분파가 존재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인 이슬람교는? 물론 이슬람교에도 다양한 분파가 존재한다. 그래도 기독교나 불교에 비하면 그 수가 매우 적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전문 성직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이슬람교의 가장 큰 분파는 수니(Sunni)파와 시아(Shi’a)파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교도가 극히 드문 우리가 이 두 파를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아랍 세계가 세계의 관심 지역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이슬람교의 주요 파지만 그 외에도 수피즘(Sufism)이라 불리는 신비주의적 신앙도 이슬람교의 한 형태이고 하와리즈파(Khawarij)라는 강경한 파벌도 존재한다. 또 이스마일(Izmail)이라는 6대 칼리프(caliph)의 둘째 아들을 따르는 파도 소수지만 존재하고 그 외에도 여러 파벌이 활동 중이다.

 

수니파는 현재 이슬람교도의 약 85~90퍼센트를 차지하는 다수파로서, 스스로 정통파라고도 부른다. 마호메트가 후손을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칼리프라고 불리는 이슬람 공동체의 통치자를 마호메트의 합법적 후계자로 인정한 파다.

 

반면에 시아파는 4명의 칼리프가 아니라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4대 칼리프인 알리를 유일한 후계자로 인정했다. 이는 마호메트의 자손만이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후계자 문제뿐 아니라 아랍인과 페르시아인과 그 외의 민족간 감정도 포함된 복잡한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아랍 세계에서는 대부분이 수니파 이슬람교도인 것에 비해 페르시아인이 주류를 이루는 이란과 그 주변 국가들에 시아파가 많이 살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니파는 정통파라고 자신들을 칭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형식을 채택했으니, 외국인 칼리프까지 허용했다. 또한 새롭게 이슬람교의 우산 아래 들어오는 공동체의 관습을 허용하는 등 관용을 통해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인도네시아와 아프리카 등 새롭게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대부분의 나라들은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반면에 시아파는 초기에 이슬람교도의 공동체적 지배를 지지한 정치적 파벌로 시작해 훗날 종교적 운동으로 진화되었다. 이들은 이슬람교를 세속적으로(다른 말로는 융통성 있게) 수용하는 데 반발하는 독실한 신자들과 아랍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던 비아랍계 이슬람교도, 즉 마왈리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오늘날 이란과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과 그 외의 몇몇 지역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아파는 세계 이슬람교도의 10~15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수니파와 시아파 왜 싸우는가? ]

 

헤지라 - 이슬람교가 세계 종교로

유일신 알라 앞에 모든 신자는 평등하며 부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무함마드의 존재는 메카의 유력 부족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신변이 위험해진 무함마드는 인근 도시 메디나로 거처를 옮기는데 이것이 이슬람력의 기원이 되는 헤지라(이주, 이탈이라는 뜻)입니다. 622년의 메디나 이주가 중요한 까닭은 무함마드가 그곳에서 자신의 부족에서 벗어나 다른 민족과 공동체를 이루어 전 아랍을 묶는 신앙 공동체(움마)를 결성하고, 민족과 출신지를 떠나 무슬림이라는 것만으로 형제가 되는 이슬람 세계를 만들어 스스로 신의 사도이자 중재자, 군사령관으로서 제정일치의 모든 권한을 쥔 강력한 지도자로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무함마드는 움마를 세우고 자신을 위협하는 메카의 군대와 내통한 메디나의 유대교도를 몰아내고, 메카와 세 번에 걸친 전쟁 끝에 무슬림군을 이끌고 다시 메카에 입성한 후 사망할 때까지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 지역을 통일합니다.

종교 지도자를 선출로 뽑다 - 정통 칼리프 시대

632년 6월 8일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갑자기 사망하자 무함마드를 이을 지도자 결정 문제를 놓고 회의를 열게 됩니다. 핏줄로 따지자면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무함마드의 딸과 결혼한 알리가 후계자가 되어야 하지만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장인이면서 당시 높은 도덕성과 인품으로 무슬림의 존경을 받았던 아부 바크르(573?~634)가 첫 후계자(칼리프)로 선출됩니다.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와 전투에 승리해 이슬람 제국의 기초를 닦은 아부 바크르는 칼리프에 오른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숨을 거두기 전 우마르를 2대 칼리프로 지명합니다.

 

우마르는 포교를 위한 정복 전쟁에 나서며 팔레스타인 지역과 사산조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정복하며 지중해 연안의 패권을 장악합니다. 이 과정에서 적이 많이 생긴 우마르는 기독교도에게 암살을 당합니다. 3대 칼리프는 우마이야 가문의 우스만으로, 재위 기간 중 인더스강 유역과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이슬람 제국을 형성했고 코란을 정비해 교리를 체계화합니다. 그러나 타민족 폭도들에게 암살당하고 맙니다.

 

4대 칼리프는 오랫동안 칼리프 자리를 원했던 알리에게 돌아갑니다. 청빈한 삶으로 높은 도덕성을 지닌 알리였지만 20여 년 동안 번번이 칼리프 자리를 놓치자 불만이 많았다는 소문이 나면서 3대 칼리프 우스만의 암살 배후로 의심을 받습니다. 이슬람 세력 간 분열을 원치 않았던 알리는 우스만의 암살 배후를 캐지 않았는데 그것은 더욱 의심을 부추기고 말았습니다. 결국 알리는 우마이야 가문에서 보낸 자객한테 암살당하고 이로써 무함마드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고 그의 언행을 본받은 정통 무슬림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아부 바크르에서 알리에 이르는 네명의 후계자 시대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 하며 이후 이슬람 세계는 우마이야 가문의 세습 체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천 년의 갈등이 시작되다

 

무슬림 공동체 움마의 관행과 관습인 순나(sunnah)에 의해 선출된 칼리프를 추종하는 세력을 ‘순니’라고 합니다. 수니파는 무함마드를 최후의 예언자로 보고 코란을 최종적 계시로 삼으며 이슬람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이슬람 국가를 통치해 왔습니다. 현재 수니파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전 세계 무슬림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주류입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분쟁의 중심에는 ‘알리’가 있습니다. 메카의 무슬림들이 아부 바크르를 초대 칼리프로 선출했을 때 메디나의 무슬림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자손만이 이슬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지지하며 시아파1)를 만들었습니다. 시아파는 무함마드를 잇는 후계자도 신의 계시를 받아 코란에 덧붙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마이야 가문이 칼리프를 선출이 아닌 세습 체제로 이어가자 시아파는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알리의 차남 후세인은 우마이야 가문에 대항해 680년 이라크의 카르발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4대 칼리프인 알리의 가문에 칼리프 지위를 돌려주려는 운동에서 시작된 시아파는 알리와 그의 자손들을 이맘(Imam)이라고 부르며 이맘이 이슬람 공동체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시아파는 현재 이란과 이라크를 포함해 걸프 지역, 시리아, 레바논에 소수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후세인이 처참하게 살해된 날이 되면 채찍으로 몸을 혹사시키는 희생 의식을 천 년째 이어오며 수니파에 대한 오랜 원한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도 화합할 수 없는 그들

 

현재 전 세계 이슬람교도 12억 명 가운데 수니파는 90퍼센트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시아파 역시 이란(90%), 이라크(63%), 바레인(70%)은 물론이고, 사우디아라비아(10%), 쿠웨이트(25%), 레바논(45%) 등에서도 정권을 흔들 만한 세력으로 혼재하고 있습니다. 2011년의 바레인 사태는 다수의 시아파가 소수의 수니파 지배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으로 수니파가 정권을 잡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바레인에 시위 진압군을 파견하자 이란이 맞대응하면서 더욱 불거졌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페르시아만 건너 이란의 시아파가 사우디아라비아 옆에 있는 바레인을 넘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겠지요. 분쟁도 심각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분열도 분쟁의 불씨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p.39 

Centro Espirita Beneficiente Uniao do Vegetal

 

p.43

덴마크 언론사 Jyllands-Posten, 이슬람 만평이 실린 신문

 

One Response to 40 DEAD AS MUSLIMS ATTACK CHRISTIANS DURING HIGH HOLIDAYS IN NIGE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