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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 읽고 있습니다만.../천천히 읽는 도킨스 (GOD DELUSION ) 주석

천천히 읽는 도킨스 (GOD DELUSION ) 주석 EP 7

by 다리디리다라두 2023. 2. 28.

7. '선한' 책과 변화하는 시대정신

p.356

 

기이한 책

존 셀비스퐁 주교                              리처드 할러웨이 대주교

 

구약성서

p.361
롯은 천사들을 극진히 집으로 맞아들였는데, 얼마 뒤 소돔의 모든 남자들이 몰려들어 롯에게 비역질을 할 수 있게 천사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창세기 19장 5절)
※ 비역질은 동성애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동성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끼리의 성교를 뜻한다. 여자들끼리의 성교는 '밴대질'이라고 한다.

p.366
※ 판관기(判官記, 히브리어: ספר שופטים(Sefer Shoftim)) 또는 사사기(士師記)는 원래 히브리어로 쓴 성경이며, 히브리어 성경(타나크, 유대교 성경)과 기독교 구약성경에 나타난다. 그 제목과 내용에 따르면, 판관기는 성경의 판관(현대의 재판관과 혼동되지 않기 위한 표현)과 그들이 고대 이스라엘을 통솔하는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판관기는 공동번역성서의 표기로 표준새번역, 개역개정판, 한글개역판에서는 사사기로 표기되어 있다.

신약성서

p.367

줄리아 스위니 <신을 떠나 보내라>

 

p.379

 

 

 

 

 

 




 

게자 베르메스     [유대인 예수]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년 11월 13일 ~ 430년 8월 28일)

 4세기 알제리 및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신학자로,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라고도 불린다. 그의 이름을 라틴어 아우구스툼(Augustum)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좋은 징조의’ 또는 ‘덕망있는’이란 뜻을 담고 있다. 영어식으로 오거스틴(Augustine) 이라고 부를 때도 있고, 간혹 아우구스틴(Augustin)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그는 기독교 신학은 물론 서양 철학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아우구스티누스주의(Augustinism)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그의 신학이 기독교 발전에 끼친 영향은 구원에 대한 교리를 정리한 사도 성 바울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과 지식의 관계에 대해 신앙이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신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과 일반 학문을 함께 연구하는 중세의 스콜라 학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중요한 신학적 공헌은 은총론이다. 펠라기우스의 선행구원론을 반대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한 구원을 남겨주었다.로마 가톨릭과 성공회의 성인. 축일은 8월 28일. 상징물은 주교관과 목장·책·펜이며, 인쇄공과 신학자의 수호 성인이다. 일반적으로 집필에 몰두하는 주교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15세기의 그림에는 주변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거나 조가비가 있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오늘날의 알제리에 해당하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북아프리카의 소도시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였으나, 어머니 모니카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어머니 모니카가 아우구스티누스를 교육했으나 어렸을 때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향과 인근 도시 마다우로스 혹은 마다우라(Madaura)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카르타고에서 공부를 하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370년 집안의 사정이 나아지자 아버지는 16살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수사학을 배우게 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유학보냈다. 카르타고에서 그는 키케로의 글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철학에 심취하게 된다.

어머니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와 같은 그리스도 교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당시 철학에 심취해 있던 그는 마니교의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교리에 매력을 느껴 마니교도로서 10여년을 머무르기도 하는 등, 마니교를 지지하여 실질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거부했다. 또, 이 시기(371년) 열입곱 살에 그는 한 젊은 여성과 동거생활을 시작하여 14년 동안 같이 살면서 아데오다투스(라틴어: Adeodatus 신으로부터 주어진[*])라는 아들을 낳기도 한다. 이 아들은 389년 어린 나이에 죽을 때까지 아버지 품에 살았다. 이러한 아들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과 절교를 선언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곧 마니교 지도자들의 지적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 회의를 느껴 잠시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가, 마니교도 동료의 추천으로 타가스테, 카르타고, 로마, 밀라노 등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밀라노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를 만났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수사학이나 철학에도 능한 언변의 달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아 그의 설교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한동안 심한 내적 갈등을 겪은 끝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결국 386년 여름, 부활주일 날에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게 된 사건이 회개의 계기라는 말도 있다. 그것은 그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집어 읽으라!” 라는 어린 아이의 노랫소리를 듣고,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로마서) 13장 13절~14절을 읽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를 받고 이듬해 낙향하여 북아프리카로 돌아와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채 고향에 도착하기 전 그의 어머니와 아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지만, 고향에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동료들과 스스로 수도회를 설립하는 등 수도사 생활에 전념한다.

 

391년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 레기우스에서 발레리우스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받은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자기가 몸 담았던 마니교를 비판하는 등 많은 설교 활동도 했으며,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하였다. 그는 인간의 공로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은혜론, 신학적 인식론, 교회론, 영성신학 등의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중세 초기부터 은혜론을 둘러싼 신학 논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심지어 종교개혁자인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도 그의 은혜론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근대에 들어와 얀센주의자들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을 지지하였다.395년 발레리우스 주교가 노쇠하자 그의 공동주교로 선출되어 4년 동안 주교를 보좌하다가, 이듬해 그가 죽자 히포 교구의 주교가 되어 평생동안 히포 교회와 북아프리카 교회를 위해 사목하였다. 427년 반달족(게르만족의 한 민족)이 북아프리카를 쳐들어왔을때, 피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아우구스티누스 주교가 살고 있던 히포에 쏟아져들어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였으므로 안전한 곳으로 찾아가거나, 교회에 은둔할 수도 있었지만, 기꺼이 피난민들을 위해 봉사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는 430년 8월 28일, 반달족이 히포를 점령하기 얼마 전(반달족의 히포 점령은 431년의 일) 피난민들을 돌보다가 걸린 열병으로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이 땅의 삶을 끝내는 순간까지도 전쟁으로 두려움에 빠진 난민들을 돌보며 피난처를 제공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이웃이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때,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는 행동은 우리를 불행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행복에 이르게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p.382

오늘날의 진보적인 윤리학자들은 희생양 이론(무고한 사람을 처형함으로써 죄인의 죄를 대신 갚도록 한다는 것)은 커녕 어떤 형태의 응징적인 처벌이론도 옹호하기 어렵다고 본다.
오늘날의 진보적인 윤리학자들의 기준에서는 희생양 이론(무고한 사람을 처형함으로써 죄인의 죄를 대신 갚도록 한다는 것)은 커녕 어떤 형태의 응징적인 처벌이론도 옹호하기 어려울 것이다.

p.383

Love Thy Neighbor

 

The Evolution of In-Group Morality  By John Hartung
Skeptic, Vol. 3, No. 4, 1995

네 이웃을 사랑하라-내집단 도덕의 진화

존 하텅 지음
1995년 스켑틱지에 발표한 논문.

 

p. 384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내집단 도덕의 진화


나는 종교인들이 더 이상 성서에 나온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는 신중함을 보인 바 있다. 나는 그 점이 바로 도덕이 종교가 아닌 다른 원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원천이 무엇이든, 또한 우리가 종교를 지니고 있든 말든, 우리 모두가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는 종교인들이 더 이상 성서에 나온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는 신중함을 이미 언급했다. 그 점이 바로 도덕이 종교가 아닌 다른 원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원천이 무엇이든, 또한 우리가 유신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모두가 그 원천을 이용한다고 생각한다.
 

마이모니데스

모세 벤 마이몬(히브리어: משה בן מימון Moshe ben Maimon, 라틴어: Maimonides 마이모니데스[*], 아랍어: أبو عمران موسى بن ميمون بن عبد الله القرطبي الإسرائيلي Abu Imran Mussa bin Maimun ibn Abdallah al-Qurtubi al-Israili[*](이븐 마이문)

1135년 3월 30일 ~ 1204년 12월 13일)은 유대인 철학자, 의사이다.
그의 의학 관련 저서 중에서는 《의학원리집》이 가장 유명하다.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는 아리스토텔레스파의 아랍 철학자의 견해를 취하여 유대교 신학을 합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저술에는 주로 아랍어를 사용하였지만, 이는 이후 히브리어, 라틴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의 저서는 유럽의 철학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p.389

유대인의 신을 이교도들에게 받아들이게 한다는 착상을 떠올린 사람은 바울이었다. 하텅은 나보다 더 퉁명스럽게 말한다. "바울이 자신의 계획을 불결한 자들에게 적용하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 예수는 무덤에서 돌아누웠을 것이다."

하텅은 <요한계시록>에서도 몇가지 재밌는 사항을 찾아냈다. <요한계시록>은  성서 중에서 가장 기이한 책에 속한다. 그것은 성 요한이 썼다고 추정되며 《켄의 성경 안내서》에 명쾌하게 설명되어 있듯이, 그의 서간집이 끓는 가마솥에 든 요한이라고 한다면 <요한 계시록>은  산에 담근 요한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은 그토록 원하는 기독교인으로 태어날 자를 어떻게 결정했단 말인가? 그의 찬가를 부를 자로 왜 와츠 등을 선호한 것일까? 게다가 와츠가 잉태되기 이전에는 그의 본질 즉, 선호되는 실체의 본질을 뭐라고 해야 할까? 이런 의문들은 바닥이 깊은 물과 같지만,
신은 와츠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기독교인으로 태어날 자로 어떻게 결정했단 말인가? 그를 찬양할 사람을 왜 와츠 등을 결정한 것일까? 와츠가 잉태되기 이전에는 그의 본질의 어떤 면이, 신이 선호하는 실체의 본질이었을까? 이런 의문들은 바닥이 깊은 물과 같지만.

 

역사


얼스터 인구의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라는 점을 감안한 영국이 아일랜드 정부법으로 1920년에 아일랜드가 독립할 때에 남부 아일랜드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에 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IRA는 무장 투쟁을 계속 전개함에 따라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1972년까지는 북아일랜드 자치 정부가 있었으나 IRA와 영국 정부군의 무력 충돌로 해산되었고, 이후 북아일랜드는 엄청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무장 투쟁은 소강 상태에 이르렀지만 국지적 충돌이 지속되었다. 포 그린 필즈와 더 윈즈 아 싱잉 프리덤은 이와 관련된 노래이다.

 그러나 1999년에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으며 투표 결과에 따라 북아일랜드 자치 정부가 다시 생겨났다. 그러나 아직도 국기는 유니언 잭을 그대로 사용한다. 2005년 IRA는 무장 투쟁 중단을 선언하면서, 현재는 무력 충돌이 중단된 상태이다.

북아일랜드 종교분쟁의 배경
북아일랜드의 종교 갈등은 18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17세기 올리버 크롬웰의 침공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 아일랜드에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현재 북아일랜드의 얼스터에 이주 온 장로교인들은 가톨릭 신자들을 밀어내고,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이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일랜드 사람들은 수백 년이나 영국에서 온 개신교인들에게 차별과 억압을 받았고, 이들의 불만은 부활절 봉기(1916년), 아일랜드 공화국군결성 등의 무장투쟁으로 폭발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가톨릭을 신봉함으로써 아일랜드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 것도 개신교 교인들의 아일랜드 지배에 기인한다.

정계의 화해노력

아일랜드 교회의 화해노력

최근 상황
2009년 북아일랜드는 IRA 강경파로 의심되는 괴한이 영국군에 총을 난사하면서 사상자가 생겨났다. 그리고 아일랜드와 통합을 주장하는 리얼 IRA는 북아일랜드에 있는 영국군 기지 공격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평화노선에 반대하는 무장세력들이 새로운 IRA을 조직했다.

p.397
도덕적 시대정신

우리 대다수는 쓸데없는 고생을 자초하지 않는다.

불독 드러먼드

토머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년 5월 4일~1895년 6월 29일)는 영국의 생물학자로 불가지론(agnosticism)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잉글랜드의 일링에서 태어났다. 헉슬리의 아버지는 지역 일링 사립학교의 교사였다.

남양 지역을 탐사하는 영국 군함 래틀스네이크호에 보조 외과의 자격으로 승선하여 4년간 해상 근무를 하게 된다. 래틀스네이크호에서 근무하는 동안 헉슬리는 호주를 비롯한 남양 지역 해양 동물의 형태학, 비교해부학, 고생물학적 연구 결과들을 정리하여 런던으로 보냈고, 1854년 《대양산의 히드로 충류》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무렵 찰스 다윈의 학설에 영향을 받은 그의 논문은 많은 공격을 받았으나, 그로 인하여 왕립 광산 학교의 교수·런던 대학의 시험 위원 등을 지냈다. 1883년 왕립 협회 회장이 되었다. 뛰어난 수필도 많이 발표한 그는 다윈의 학설을 널리 알리고, 정치 제도의 개선, 과학 교육의 발전 등 여러 방면에 크게 활약하였다. 저서에 《자연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 등이 있다.

진화와 윤리

 

 

 

 

토머스 헉슬리의 ‘로마니스 강연’의 강연 내용과 이에 대한 해설 격인 ‘서문’을 옮긴 책. 헉슬리는 인간의 윤리가 진화의 산물이며 인간은 진화가 이끄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윤리적 세계를 지향하면서도 우주의 진화를 거스르는 현대 문명의 지나친 경쟁 구도에 경종을 울릴 만한 책이다.

헉슬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현대 문명은 윤리적 세계를 지향하면서 우주 진화를 거스르면서 형성되어 왔음을 강조한다. 동시에 그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통한 진화 과정은 여전히 국가들 사이의 경쟁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그 경쟁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국가 구성원들 사이의 경쟁을 자제하면서 윤리적 삶을 연마해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 초판을 내각들에게 발표하는 그림. Carpenter. 1864 년 그림

에이브러햄 링컨의 노예제도에 대한 견해
일부 기독교인은 링컨이 노예제도가 비성서적인 것으로 보아 반대했다고 인식하고 있으나, 링컨의 주된 관심사가 노예제도의 폐지나 노예제도 자체라기보다는 노예제도 존폐 문제로 서로 대립하던 남부와 북부의 분리를 막는 것이었던 점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노예출신 흑인들은 정부에서 노예에게 자유만 줄 뿐, 생계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옛 상전 밑에서 농장 노동자로 다시 종속되었으며, 공화당의 반발로 흑인에 대한 사회에서의 차별도 여전했다. 오히려 백인우월주의를 주장하는 비밀 테러 단체(대표적인 예가 KKK단)의 출현으로 흑인은 새로운 탄압을 받았다.
물론 링컨 자신은 노예제도의 비인도성에 대해 “악의 제도”라고 말할 정도로 다소 회의적이고 비판적이었으나, 노예제도와 흑인 문제 전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노예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는 자본주의 경제지역이라 노예가 아닌, 임금 노동자가 일하는 북부에서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었다. 나아가 링컨은 의지가 박약하거나 미숙하여 남북 분리를 초래했다는 우려의 말을 듣기도 하였다.

노예 해방 선언
1862년 7월, 의회에서 남북전쟁에 가담한 자들의 노예를 강제 해방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링컨은 의회 권력으로 이를 실현하는게 불가능하며, 전쟁 사령관 직권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보았지만, 이 법안을 승인했다. 그 달,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의 첫 판을 내각들에게 발표했다. 이 안에 그는 "정당하고, 필요한 군사 조치로서, 1863년 1월 이후부터, 남부에서 노예로 잡혀있는 모든 사람을 영구히 해방시킨다."라고 적고 있다.
1862년 9월 22일 발표되고, 1863년 1월 1일 발효된 〈노예 해방 선언〉은 북부의 통제 하에 들어있지 않은 영역의 모든 노예를 해방하도록 했다. 노예 제도 폐지가 군사적 목표로 설정되어, 북군이 남으로 진주하면서 해방된 노예가 3백만에 육박했다.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에 선언하며 "나는 내 삶에서 내가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을, 내가 여기 서명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 느껴본 적이 없다" 고 첨언했다. 노예 해방 선언이 발표된 후 13 명의 공화당 주지사가 전쟁 주지사 회의 에서 만나,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을 지지하되, 조지 B. 매클렐런 장군을 북군 사령관에 넣지 않도록 하는 것을 권고했다.
노예 해방 선언 이후 해방된 노예를 소집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링컨은 이 정책을 처음에 완전히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을 표했지만, 1863년 봄, 그는 "대대적인 흑인 모병" 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다. 테네시주의 주지사 앤드류 존슨에게 쓴 흑인 군대 소집을 권하는 편지에서 링컨은 "5만 명에 달하는 무장하고, 훈련받은 흑인 병사들이 미시시피강변에서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반란은 끝날 것입니다" 고 쓰고 있다.  1863년 말, 링컨의 지시에 따라 로렌조 토머스 장군은 20개 연대에 달하는 흑인들을 미시시피 강변에서 소집했다

태즈메이니아주머니늑대(Thylacine)

오스트레일리아의 태즈메이니아 섬에 서식했던 육식 유대류(有袋類)이다. 주머니를 가지는 늑대라는 점에서 수렴진화의 대표적 예로 꼽힌다. 등에 호랑이와 비슷한 무늬를 가졌기 때문에 태즈메이니아호랑이(Tasmanian Tiger)라고도 한다. 태반동물인 늑대나 개 등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나 상당한 해부학적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태즈메이니아늑대(Tasmanian Wolf) 또는 사일러사인(Thylacine)이라고도 부른다.

생태
단독 또는 한 쌍으로 행동하며, 낮에는 나무나 바위의 그림자에서 보내고, 해가 진 뒤에 사냥하러 나갔다. 먹이로는 소형 포유류를 주로 포식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본래 태즈메이니아주머니늑대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및 뉴기니 섬 일대에 생식하고 있었지만, 3만 년 전에 인간이 진출하면서 인류나 야생개인 딩고에게 먹이를 빼앗기고 인류가 발을 디디지 않았던 태즈메이니아 섬에만 살게 되었다.

 

수난과 멸종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으로부터 인간이 정착하게 되면서, 양 등의 가축을 해치는 유해동물로 여겨진 주머니늑대는 대량 학살당했다. 1930년에, 마지막 야생 주머니늑대가 사살되었으며  런던 동물원에서 기르던 주머니늑대도 죽으면서 멸종했다고 생각되었으나, 1933년에 야생 암컷 주머니늑대가 한번 더 포획되어 호바트 벤자민 동물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조차도 1936년 9월 7일에 죽음으로써 전멸하였다. 현재도 태즈메이니아 및 다른 오스트레일리아 지역에서 종종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의 모습이나 발자취가 보고되곤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도널드 헨리 럼즈펠드
(영어: Donald Henry Rumsfeld, 1932년 7월 9일 ~ ) 미국의 사업가, 정치인, 제13대·제21대 국방부장관이다.

생애
시카고의 외곽 에번스턴에서 출생, 1954년에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였다.

 

경력
1963년부터 1969년까지 일리노이 주의 하원 의원을 지냈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 아래 경제기획국장을 맡았다.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나토 주재 미국 대사를 역임하였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 백악관 수석을 지내다가, 1975년에 제럴드 포드 대통령 아래에서 13대 국방부장관이 되었다. 1977년 보건 제품 회사 G. D. 시얼사의 사장이 되었다. 1983년부터 1984년까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아래에서 중동 문제에 관한 특별 교섭인으로 지냈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현 모토롤라 사의 전신인 제네럴 인스트러먼트사(General Instrument)의 사장이 되었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밥 돌 공화당후보의 국민 의장을 지냈다.

21대 국방부장관
미국 중앙군 사령관 토미 프랭크스 장군과 함께 2001년에 조지 W. 부시 대통령 내각 아래 21대 국방부장관이 되었다. 그해 9월 11일에 일어난 911 테러 사건에 대해, 국가의 군사 응답을 도왔다.

또한 2003년에 일어난 이라크 전쟁에도 군사 작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2006년 재임 도중에 사임하였다.

p.406
존경받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신학자 A.C.부케는 《비교종교》에서 이슬람교를 다룬 장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했다. 

"셈족은 19세기 중반에 추정되던 것과는 달리, 본래 일신교도가 아니라 그는 물활론자다." 

(문화가 아닌) 인종에 집착하고 복수형이 아니라 한 '유형'을 가리키는 단수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행위는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흉악한 짓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도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작은 지표들이다.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 1866년 9월 21일 ~ 1946년 8월 13일) 

과학 소설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문명 비평가이다. 또한 역사, 정치, 사회에 대한 여러 장르에도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쥘 베른, 휴고 건스백과 함께 '과학 소설의 아버지'로 불린다. 《타임머신》, 《투명인간》 등 과학 소설 100여 편을 썼다.

 


집안이 가난하여 독학으로 대학을 졸업하였다. 초기에는 생물학을 공부하였고 다윈주의적인 맥락에서 인종문제를 고찰하였으나 그의 후기 작품은 점차 정치적이면서 설교적인 색채를 띄어갔다. 후기에는 과학소설을 거의 집필하지 않았다. 몇몇 작품들은 중산층의 삶을 묘사하였는데, 이를 통해 웰스는 찰스 디킨스를 잇는 훌륭한 계승자라고 칭송받게되었다. 차차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국경이 없는 세계 국가를 만들어 민족간의 싸움을 없애자고 하였다. 1905년 〈근대 유토피아〉 이래 문명 비평에 관심을 가져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하였다. 저서로 《세계 문화사 대계》, 《생명의 과학》등이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무신론자였을까?

 노엘 바버 『황금뿔의 군주들』

존톨랜드

미국의 전쟁 다큐멘터리 작가이자,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 철저한 고증과 함께 객관적 서술로 이름이 알려진 미국의 대표적인 전쟁 다큐멘터리 작가다. 그의 저술에 대한 신념은 전쟁의 역사를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었던 그대로'기록하고 재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그가 저술한 일제(日帝)의 흥망과 태평양전쟁을 다룬 '떠오르는 태양 (The Rising Sun)'이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으며,'《아돌프 히틀러 : 전기 결정판》'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차지하였습니다

 

 
P.418
그것은 우리에게 히틀러가 단독으로 잔학 행위를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히틀러가 단독으로 그런 잔학 행위를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한다.

교황 비오 12세(Pope Pius XII)

히틀러의 교황으로 알려진, 비오 12세는 우스타쉬 정부의 수장 파벨리치를 비롯한 이 학살자들에게 '실천하는 카톨릭 신자'라며, 찬사과 축복을 보냈다.  잔혹한 종교 재판의 업적 또한 높히 평가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직접 파벨리치의 자택을 방문해, 그 가족들과 함께 모여 사진을 찍기도... 그리고 수용소에서 사형 집행과 고문을 담당했던, 파벨리치의 비밀 경찰들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 야세노바츠의 학살자들은, 파벨리치가 특별히 로마 카톨릭 교황 비오 12세에 바치는 선물이다. 異說 있음

스테피나츠 대주교와 파벨리치


스테피나츠 대주교는 이 잔혹한 대학살의 실제 지휘자였으며, 그는 또한 비오 12세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고위 성직자들과 함께, 우스타쉬 정부의 의원으로 활동하며 카톨릭 개종에 관한 법률들을 제정했다.그리고 대학살의 집행자로서도,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 그가 관할하는 한 교구에서만 46만의 정교회 신자들 중  5만명이 추방되었고, 5만명이 산 속으로 숨어들었으며 그리고 4만명이 카톨릭으로 강제 개종하였다. 나머지 28만명은, 모두 끔찍하게 '학살'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