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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 읽고 있습니다만.../천천히 읽는 도킨스 (GOD DELUSION ) 주석

천천히 읽는 도킨스 (GOD DELUSION ) 주석 EP 9

by 다리디리다라두 2023. 2. 26.

9. 종교로부터의 도피

 

모르타라의 일화

 

모리츠 오펜하임의 1862년 그림『에드가르도 모르타라의 유괴』
데이비드 커처 作 《에드가르도 모르타라의 유괴》,

p.479 

헨리 8세는 후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앤(Anne Boleyn)과 혼인하기 위하여 왕후 캐더린과의 이혼을 재가해 주기를 교황에게 청원했으나 이를 거부당하자 교황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왕은 1532년 토마스 크랜머 (1489~1556)를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고 성직자의 임직세를 송금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크랜머는 교황권보다 세속권의 우위를 주장하면서 헨리를 지지하였다. 1533년 크랜머는 왕의 캐더린과의 이혼을 합법화하고 앤과의 결혼을 합리화하였으며, 앤에게서 난 엘리자베스를 왕위 계승권자로 인정하였다. 1534년 국회는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교황의 권한을 배제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같은 해에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공포하여 왕을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선언하였다. 잉글랜드에서는 이와 같이 교회 행정적으로 교황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잉글랜드 교회의 분립을 선언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1547년 왕위를 계승한 에드워드 6세 하에서 개혁은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성찬에서는 평신도들에게도 떡과 잔을 허락하였으며, 기부금을 낸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드리는 채플을 폐지하였다.
크랜머는 또한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 요한 낙스(John Knox) 등과 함께 1553년 에드워드의 공인을 받아 선포된 「42개 신조」를 작성하는 일에도 기여하였다. 「42개 신조」는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39개 신조」(39 Articles)로 개정되어 현재까지 잉글랜드 성공회의 신앙고백서가 되고 있다.
1553년 에드워드가 죽자 그의 누이, 즉 캐더린의 딸 매리(1553~1558)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매리가 왕위에 오르자 가톨릭 교회의 복원을 꾀하는 바람에 잉글랜드의 종교적인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여왕은 1554년 스페인의 필립 2세와 결혼하고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반종교개혁 운동에 고무를 받아 종교개혁 운동을 탄압하였다. 크랜머, 래티머(Hugh Latimer), 리들리(Nicholas Ridley), 후퍼(John Hooper, 1495~1555) 등을 포함하는 300여명의 개혁자들이 처형되었으며, 800여명이 대륙으로 건너가 제네바, 취리히,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37세 된 메리를 환영했지만, 메리는 오래지 않아 인기를 잃게 되었다. 그의 신민들은 이미 프로테스탄트교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메리가 이제 와서 그 나라를 다시 로마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에, 에드워드가 포고했던 모든 종교 법령은 폐지되고 메리는 국민을 대신해서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잉글랜드는 로마 가톨릭 국가가 된 것.

로마와 화해를 하게 되면서, 이번에는 프로테스탄트교인들에 대한 새로운 박해의 물결이 일었다.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은 마치 온몸에 퍼지기 전에 도려내야 하는 악성 종기처럼 여겨졌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많은 사람들이 산채로 기둥에서 화형을 당해야만했다.

70세 된 프로테스탄트교 설교자 휴 래티머가 불태워질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동료 종교 개혁 운동가로 자기와 함께 기둥에서 처형되던 니콜러스 리들리에게 이러한 격려의 말을 하였다.

“안심하십시오, 리들리 선생. 남자답게 되십시오. 우리는 오늘 하느님의 은혜로 잉글랜드에 촛불을 켜게 될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결코 꺼지지 않을 촛불을 말입니다.” 헨리와 에드워드 통치 시기에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토머스 크랜머도 이단자로 단죄를 받았다.

그는 프로테스탄트교 신앙을 철회하였지만, 마지막 순간에 공개적으로 태도를 바꾸어, 교황을 그리스도의 적으로 비난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오른손이 신앙 철회 문서에 서명하는 죄를 지었다며, 오른손을 제일 먼저 불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뾰족한끝주의(Little endianism, 리틀엔디안), 둥근한끝주의(Big endianism, 빅엔디안)

원래 이 말은 원래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걸리버여행기에서 나온다. 스위프트는 당시 카톨릭 교도와 신교도들이 각자의 주장만을 하고 있는 것을 패러디해서, 소설에 소인국 사람들이 달걀을 깰 때 뭉특한 쪽(big endian)으로 깨야하느지, 뾰족한 쪽(little endian)으로 깨야하는지 논쟁하는 부분을 넣었다. 소설 내용만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 서로 싸운다라는 것의 비유다.

걸리버 여행기의 부분

"Little Endian"이라는 말은 유명한 "걸리버 여행기"라는 소설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알다시피 "걸리버 여행기"란, 항해술과 의술을 공부한 주인공이 선박의 선원들을 돌보는 외과 의사로 취업한 후,항해 도중 겪게 되는 황당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모험 소설이다. 1726년 조나단 스위프트란 영국 작가에 의해 쓰여진 이 소설은 인간의 추악한 모습들을  비유적으로 풍자하며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인 명작에 꼽히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항해 중 사고로 인해 "소인국 나라", "거인국 나라", "하늘의 섬" 등에 표류하게 되는데,"Little Endian", 그리고 그에 대립되는 "Big Endian" 이라는 용어는 이들 중 "소인국 나라"편에 등장한다.
 거대한 폭풍우에 휩쓸려 난파된 선박에서 탈출한 주인공은, 끝내 외딴 섬에 도착해 정신을 잃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인 상태였다. 주인공은 밧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수 많은 소인국 군인들의 화살 공격에 기가 죽어 순순히 복종하게 된다. 이후 주인공은 발에 쇠사슬이 묶인 채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되는데, 친절함과 너그러움으로 점차 소인국 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얻어 자유의 몸이 된 후, 이웃 국가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하며, 급기야 두 국가를 화해 모드로 이끌고, 결국엔 그 섬을 빠져나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훈훈한 이야기이다.
"Little Endian"과 "Big Endian" 이야기는 위에 언급 된 두 국가인 릴리퍼트와 블레프수크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이가 안 좋아졌는지에 대해 듣게되는 부분에서 등장하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약 36개월 전, 릴리퍼트 제국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식사 때 달걀을 즐겨 먹었다. 그리고 이들은 달걀을 먹을 때, 끝 부분이 넓직한 부분을 위로 향하게 한 다음 껍질을 깨먹었다고, 그런데 어느날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황제의 세자가 이 넓직한 부분부터 달걀을 깨어먹다
우연히 껍질에 손을 베어버린 것이다. 화가 난 황제는 앞으로 달걀을 먹을 때 넓직한 부분이 아닌, 뾰족한 부분부터 깨어먹어라, 그렇지 않는자는 사형에 처한다라는 새로운 법률을 공포하게 되지만 이에 반대하는 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여러 번의 반란 끝에 국가는 두개의 당파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뾰족한 끝 부분, 즉 작은 부분에서부터 깨어 먹는 것을 주장하는 무리를 "Little Endian",  반대로 넓직한 끝 부분에서부터 깨어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Big Endian"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Big Endian" 당파는 이웃 국가인 블레프수크의 도움을 받거나 망명을 가면서 두 국가간의 전쟁으로 발전한다. 이처럼 소인국 국가들은 작은 몸짓답게 참으로 사소한 것을 가지고 싸움을 하고 있는데, 이는 마찬가지로 사소한 것들로 전쟁을 하고 살인을 하는 우리 인간들을 풍자한 것이라고 합니다.(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종교 전쟁을 빗댄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p.481

신체적 학대와 정신적 학대

세일럼은 원래 히브리어로 평화(shalom)를 의미한다. 그러나 세일럼은 명칭과는 달리 수십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은 마녀재판으로 유명한 곳이다.
1692년 1월,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마을 세일럼(Salem). 개척 초기의 고단한 시기라 더욱 그랬겠지만, 엄격한 청교도의 규율이 적용되고 있는 마을이었다. 그리고 또한 주민들간의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한창이기도 하였다. 엘리자베스를 아내로 둔 농부 존 프락터(John Proctor)는, 아직 어린 소녀이며 그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던 에비게일 윌리엄스(Abigail Williams)와 혼외정사를 벌이고 이것이 아내에게 발각이 되자, 뒤늦게 참회하여 애비게일을 집에서 내보내고 다시 가정과 일에 충실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에 질투를 느낀 애비게일은 동네 소녀들을 모아 밤중에 몰래 숲속에 들어가, 하녀인 티튜바(Tituba)의 주관으로 닭을 죽이고 춤을 추면서 그 피를 몸에 뿌리며 자신들의 소원을 말하는 비밀스런 의식을 거행하게 된다. 물론 애비게일의 소원은 엘리자베스를 죽여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목사인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가 목격하게 되고, 소녀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게 된다. ....중략( 참고: 세일럼의 마녀사냥과 사건기록 )
1992년 세일럼 마녀사냥 300주년을 맞아 세일럼과 댄버스 시민은 이 오욕의 역사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세일럼 제1교회 또한 1992년 9월20일자로 자일즈 코리와 레베카 너스를 정식 교인으로 복권시켰다. 당시 마녀 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140명이고, 마법의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된 사람은 44명이었다.
1938년, 한때 뉴잉글랜드의 해운과 무역의 중심지이던 세일럼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해 세관 건물을 중심으로 세일럼 항구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됐고, 그 결과 예전의 영화를 말해주는 건물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경제적 갈등이 토지를 둘러싼 잦은 분쟁으로 야기된 반목과 불화가 마녀사냥을 기해 터져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마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한 소녀 중의 하나인 앤 퍼트남의 집안은 토지 분쟁으로 원한 관계에 있던 포터가(家)의 인척을 46명이나 마녀로 엮어 넣었다. 그러기에 아서 밀러는 이를 소재로 한 연극 [시련]에서 존 프록터로 하여금 "복수가 곧 법이 되었다"고 부르짖게 했다.




저스트윌리엄, 스왈로와 아마존, 허클베리핀

그러나 모든 소아성애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살인까지 저지른 극소수의 소아성애자에게나 걸맞은 복수를 감행한다는 것은 명백히 불공평하다.

 

그러나 살인까지 저지른 극소수의 소아성애자에게나 할 법한 응징을 모든 소아성애자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감행한다는 것은 명백히 불공평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이 아동살해범과 별 다를 바 없는 자경단원이나 변호사에게 좇겨다녔다면, 그들 중 한 명의 희생자였던 나(당혹스러웠지만 그 외에는 별 해를 입지 않았다)조차도 그들을 옹호해야 할 것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그들이 아동살해범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자경단원이나 변호사에게 쫓겨다녔다면, 아동성애의 희생자 중의 한 명이었던 나(당혹스러움 외에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라도 그들을 옹호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그런 소급력 있는 치욕에 대해 매우 커다란 부담을 느끼고 있다. 나는 온갖 이유로 로마가톨릭교회를 싫어한다. 하지만 불공정한 것은 더 싫다. 이 한 기관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불공정할 정도로 나쁘게 묘사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제들의 위선이 대중의 분노를 증폭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권위를 지닌 인물 즉, 아이가 요람에서부터 존경해야 된다고 배웠던 인물의 신뢰 남용이 있다. 그런 추가적인 요인이 일으키는 분노는 우리에게 서둘러 판단을 내리지 말고 더 신중할 것을 요구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치욕적인 과거사에 대해 매우 커다란 부담을 느끼고 있다. 나는 온갖 이유로 로마 가톨릭을 싫어하지만 불공정한 것은 더 싫다. 즉, 이 문제와 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나쁘게 묘사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어쩌면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제들의 위선이 대중의 분노를 증폭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권위를 지닌 인물 즉, 아이가 요람에서부터 존경해야 된다고 배웠던 인물의 신뢰 남용이 있다. 신뢰에 대한 배신감으로 증폭되는 분노는 우리에게 섣부른 판단을 자제하고 오히려 더 신중할 것을 요구한다.

 


피터 멀렌의 영화 <막달렌 시스터즈>, 막달렌 보호소 건물

 

p.486

테드 해거드(Ted Arthur Haggard, 1956년 6월 27일~)는 미국 콜로라도 주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새 생명 교회 (New Life Church) 창립자이자, 목회자이다. 미국 복음주의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NAE)장을 역임했다.
2006년 11월, 마사지사이자 남창인 마이크 존스는 동성애 결혼 반대자였던 테드 목사가 3년동안 성매매를 하고 필로폰을 구입해 투약했다고 주장했으나, 목사 본인은 마사지는 받았고 필로폰은 구입하였으나, 존스와 성관계는 맺지않았고 필로폰은 투약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북미의 게임 개발사 ‘레프트 비하인드 게임즈’는 2006년 11월 7일 자사의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레프트 비하인드 : 이터널 포스(Left Behind : Eternal Forces)’를 북미에 출시했다.
레프트 비하인드는 이례가 없던 기독교 종교 소재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라 출시 당시 기독교인 게이머들은 물론, 비 기독교 게이머들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게임은 베스트셀러 소설 ‘레프트 비하인드’가 원작으로 기독교인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휴거 현상 이후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p.487

Hell House를 운영하는 키넌 로버츠 목사, Hell House에서 상연중인 낙태 반대를 주제로 한 연극

 

 

 

 

 

 

 

《신학 대전》 (神學大全, 영어: Summa Theologica, Summa Theologica, Summa) (1265-1273)
중세의 스콜라 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표적 저서

숨마(Summa, 大全)라는 명칭은 12세기의 스콜라 용어에서 시작된 것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제시할 목적으로 편찬된 여러 학설의 전체적·체계적 집대성을 말한다.

성 빅토르의 후고에 의한 숨마가 최초의 전형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은 가장 완성된 대표적 작품이다. 페투르스 롬바르두스(1164 사망)에서 전형을 볼 수 있는 《신학명제집(神學命題集)》의 방법(성서나 교부 등의 저서 중에서 신학관계의 중요한 견해(센텐티아)를 모아서 변증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더욱 발전시켜, 철학·논리·정치·경제 등 인간에 관련되는 모든 지식을 유기적으로 구성하고 신앙의 빛에 비추어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종합적 노작이다. 《신학 대전》은 중세 대학의 교육활동에서 생긴 것으로, 신학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내용을 교육적 효과가 있도록 집약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갖고서 현실생활을 긍정한 이 신학적 사상 체계는 중세 성기(盛期)에 국가까지도 복종시키는 세속적 권력을 가졌던 로마 교회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은 3부로 구성되며 6백여 문제, 3천여 항목을 포함하고 있다. 제1부(신)와 제2부(인간)는 이탈리아에서의 교수시대(1265-68)와 파리 체재시대(1269-72)에 완성, 제3부(그리스도)는 다시 이탈리아에 돌아와 살던 시대(1272-73)에 썼으나, 미완성인 채 병사하여 제자인 피페르노의 레기날도가 '보유(補遺)'로 완결시켰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각부에 많은 문제를 세우고, 각 문제를 몇 개의 항목으로 나누었다. 또 각 항목을 이론(異論), 반대이론(反對異論), 주문(主文), 이론해답(異論解答)으로 구성하였다. 곧 스콜라학의 논증법(論證法)에 따라 우선 자기의 주장과 다른 주장을 말하고, 다음에는 이에 반대하는 주장을 말하고, 끝으로 자기의 주장을 말하여 그 이유를 설명한다. 내용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그리스 사상과 교부들의 기독교 사상을 종합한 대작이다

 

p.496

 

선택권은 아이에게

 

몽둥이와 돌로 뼈를 부러뜨릴 순 있어도 말로는 해칠 수 없다. - 영국 격언

Nicholas Keynes Humphrey (born 1943) - 영국출생,  런던 정경대학 , 옥스포드,  캠브리지, 뉴욕대학 교수, 심리학자, 그의 관심 분야는 광범위하며,  르완다에서 고릴라를 연구하기도 했다.  인간의 지능과 의식의 진화에 관한 연구로 국제적으로 유명하다. 그는 최초로 원숭이의 정신적 손상으로 인한 시력상실 현상을 실험하기도 했다. 그는 지성의 사회적 역할에 관한 유명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문학저널 『그랜타』에서 편집장을 지낸 유일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1970년대에 반핵운동에서 지대한 역량을 발휘했으며 1981년에는 BBC 브로노스키에서 "심야의 4분"이라고 이름 붙여진 기념비적인 강연을 하기도 했다. 저서로 《마음이 육체를 만들었다: 생물학과 진화의 최전선에서 쓴 에세이》, 《마음의 역사: 진화 그리고 의식의 탄생》를 포함한 10권의 책이 있다.  그는 마틴 루터 킹 상, 퓨펜돌프 메달과 영국 사회심리학 상을 동시에 수상한 몇 안되는 영예로운 학자이며. 현재는, 옥스포드에서 심리학 강의를 하면서, 캠브리지에서 동물행동학 강의를 하며, 뉴욕대학의 뉴스쿨에서는 사회연구분야를, 런던 정경대에서는 전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암만파 (Amish Mennonite)
북아메리카에 있는 보수적인 그리스도교 단체.

 원래는 구(舊)암만메노파 교회(Old Order Amish Mennonite Church)의 교도들이었다. 이들은 야코프 암만의 추종자들로서 유럽에서 탄생했다. 야코프 암만은 17세기 메노파 장로였으며, 1693~97년에 스위스, 알자스(지금은 프랑스에 있음), 남부 독일 등지의 메노파들에게 논쟁과 분열의 씨가 되는 교훈을 가르쳤다. 암만은 주장하기를 모든 메노파 사람들은 출교당한 적이 있는 메노파 사람들을 누구든 상대하지 말고 피해야 하며, 거짓말을 한 사람은 누구든지 파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배 의식 가운데 세족식(발을 씻는 의식)을 새로 포함시켰으며, 교회 회원들이 일정한 제복을 입어야 하고 수염을 깎지 말고, 국가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암만파교도들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720년경의 일이었으며, 첫 이주지는 동부 펜실베이니아이다. 이곳에는 오늘날까지도 대규모의 이주민 집단이 살고 있다.

 

  암만파 사람들은 복장이 매우 소박하고 비순응적인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로 유명하다. 남자들은 테가 넓은 검은 모자를 쓰며, 콧수염은 깎지만 턱수염은 기르며, 집에서 만든 평이한 옷을 입는데 단추 대신에 호크를 사용한다. 여자들은 보닛 모자를 쓰고, 긴 옷을 입고, 어깨 위에는 케이프와 숄을 걸치며, 검은 신과 스타킹을 신는다. 장신구는 일체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비순응주의적인 문화는 암만파 사람들이 성서의 교훈에 순종하려는 뜻에서 생각해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17세기 유럽 시골에서 유행하던 복장이었다. 암만파 사람들은 전화나 전등 사용을 피하고, 자동차보다는 말이나 4륜마차를 이용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유능한 농부들로 인정되지만, 현대적인 농경 기계 사용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이들을 공립 초등학교에는 보내지만 고등학교에는 보내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의무교육법에 어긋나는 일이어서 암만파 사람들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지만, 몇몇 암만파 부모들은 감옥에 들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아이들을 고등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P.505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

Sir Peter vady,  엠마뉴엘스쿨

 

 

 

 

 

 

 

p.506

크리스천라이프 교회의

Wayne Malcolm 주교,

 

엠마뉴엘 스쿨의 교장

Nigel Macquoid 

 

 

 

 

 

 

 

엠마뉴엘 스쿨의 과학부장

스티븐 레이필의 강연문 서두 내용.

현재는 접근불가

 

 

 

 

 

 

 

 

 

 

 

 

 

 

 

 

 

 

 

 

 

 

 

 

 

 

 

 

p.508

Let us state then right from the start that we reject the notion popularised, perhaps inadvertently, by Francis Bacon in the 17th century that there are "Two Books" (i.e. the Book of nature & the Scriptures) which may be mined independently for truth.

진리를 독자적으로 파헤칠 만한 '두 권의 책(즉, 자연의 책과 성서)이 있다는, 17세기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부주의한 생각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렵니다.

"진리를 독자적으로 밝힐 만한 '두 권의 책(즉, "자연"과 성경)이 있다"고 한, 17세기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잘못된 견해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렵니다.

 
In view of the current inclusion of Earth Science into the Sc3 component of the National Curriculum , it would seem particularly prudent for all who deliver this aspect of the course to familiarise themselves with Flood Geology papers of Whitcomb & Morris .

 

p.509

 

이 과목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모두 휘트컴과 모리스의 홍수지질학 논문들을 공부해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창조론 신학자 Henry M. Morris와 John C. Whitcomb

 

 we must acknowledge within our grand geophysical paradigm the historicity of a world-wide flood as outlined in Gen 6-10. If the Biblical narrative is secure and the listed genealogies (e.g. Gen 5; 1 Chro 1; Matt 1 & Lu 3) are substantially full, we must reckon that this global catastrophe took place in the relatively recent past. Its effects are everywhere abundantly apparent. Principal evidence is found in the fossil-laden sedimentary rocks, the extensive reserves of hydrocarbon fuels (coal, oil and gas) and the 'legendary' accounts of just such a great flood common to various population groups world-wide. The feasibility of maintaining an ark full of representative creatures for a year until the waters had sufficiently receded has been well documented by, among others, John Woodmorrappe .

우리는 원대한 지구물리학적 패러다임으로 볼 때 <창세기> 6~10장에 나온 세계적인 홍수 이야기가 사실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확실하고, 나열된 계보 (창세기 5장, 역대기 1장, 마태복음 1장, 누가복음 3장)가 실질적으로 완벽하다면, 우리는 이 지구적인 격변이 비교적 최근에 일어났다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 영향은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된 증거는 화석들이 묻힌 퇴적암, 방대하게 매장된 탄화수소 연료(석탄, 석유, 천연가스). 전 세계의 다양한 집단들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홍수관련 '전설'입니다. 물이 충분히 빠질 때까지 1년동안이나 선택받은 생물들이 가득한 방주를 지키는 것이 가능했다고 존 우드모래프를 비롯한 분들이 상세히 밝혀냈습니다.

 

 원대한 지구물리학적 패러다임으로 바라보면, 창세기 6-10장에 기록된  대홍수의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확실하고 열거된 기록이 완벽하다면 이 지구적 참사가 상대적으로 최근에 일어났던 것임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증거는 도처에서 얼마든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요한 증거는 화석이 포함된 퇴적암, 상당량의 잠재적 자원인 탄화수소 연료(석탄, 오일 그리고 가스) 그리고 다양한 거주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홍수 관련  전설들에서 찾아 볼수 있습니다. 물이 충분히 빠지기까지 1년여 동안 선택받은 피조물로 가득찬 방주를 유지할 수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Woodmorrappe 를 비롯한 분들은 논문으로에 상세히 밝혀 냈습니다.

 

존 우드모래프, 그의 패기넘치는 역작 《노아의 방주 (가능성 고찰)》,그 책에 실린 동물 시설 그림(폐기물 자체 처리 가능한  경사진 마루 설계란다.) - 비루한 신학의 비애 

 

 

p.511

개의 가축화
 
개의 가장 먼 조상은 신생대 제 3기 경인, 지금으로부터 약 4,000만년 전에 출연했던 마이어서스(Miacis)로 추정됩니다. 마이어서스는 족제비 정도의 크기로 주로 숲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금의 개에 비해 긴꼬리와 짧은 혀를 가지고 있었으며 발가락 대신 발 발바닥으로 걸어 다녔습니다.

현재 개의 직계 조상을 늑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개과의 동물 중 개와 염색체 78개가 동일한 종은 늑대, 코요테, 자칼 등 3종류로 이들은 개와의 번식이 가능하며 그 후대 역시 번식이 가능하기에 3종 모두 개의 직계 조상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개를 사육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약 1만~1만2천 년 전 지금의 이라크 지방의 팔레가우라(Palegawra)동굴에서 발견되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아직 불분명합니다. 공식적으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페르시아의 베르트 동굴의 것으로 BC 9,500년 경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지금의 이스라엘 북쪽 지방의 무덤 발굴 현장에서 여자 미이라와 함께 발굴된 3~5개월 된 강아지의 유골이 그 증거입니다. 이어 BC 9,000년 경으로 추산되는 독일 서부의 셍켄베르크개는 그 크기와 두개골이 딩고라고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 들개와 거의 같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여러 유물에는 개들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으며 피라미드에서는 개가 파라오 미이라와 나란히 발견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전 세계 각 문명지 마다 개의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개와 함께 지내면서 개가 가진 특성을 이용하게 되었으며 개는 늑대로부터 물려 받은 야성의 기질 등을 점차 잃게 되고 점점 더 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인간의 유전학이 발달된 후에는 우수한 형질을 지닌품종을 대상으로 하여 선택적 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번식으로 지구상에는 약 400여종의 품종이 존재하게 되었고 각각 특정 목적에 의해 고유의 성격과 외양을 갖게 되었으나 반대의 경우 품종 고유의 신체와 품성이 손상 받기도 하였습니다.   13세기 중엽 영국의 헨리 3세에 의해 최초로 매스티프종(Mastiffs)이 공식적으로 인증되었으며, 1859년에는 영국의 뉴캐슬지방에서 최초의 도그쇼가 개최되었습니다. 이후 1873년에 영국 켄넬 클럽(The Kennel Club)이 형성되는 등 개의 기준을 점차 객관화, 세분화 시키는 과정이이때 도입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출처- 마이 독 & 삼성 http://mydog.samsung.com/index.jsp 

 

p.515

 

아이들에게 자유를

 

p.517

 

앞에서는 우리가 '후덕한 사람들(people)'이 아니라 '후덕한 사람들(men)'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움찔할 정도로 여성운동가들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는 시작으로 '의식 각성'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앞부분에, 우리가 '후덕한 사람들(people)'이 아니라 '후덕한 사람들(men)'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제는 움찔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세상이 변했다는 글을 시작으로 '시대정신', 혹은'의식 각성'이라는 얘기를 했다.

 

holy cross belfast 2001
북아일랜드의 분쟁의 불씨를 제공한 17세기 개신교도들의 이주 정책인 얼스터 식민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서 청교도,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 등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고자 한다.

 

 

 

 

다음의 문장은 앞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16, 17세기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온 이주자들이 개신교 신앙을 갖고 아일랜드, 특히 얼스터에 정착했다.(영국에 의한 ‘얼스터 식민’이라고 말하는데 북부 얼스터 지방을 중심으로 프로테스탄드(개신교도) 인구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얼스터의 개신교 인구는 1685년 낭트 칙령 폐지 후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야 했던 위그노들(프랑스 신교도)이 18세기에 이 지역을 피난처로 삼음으로써 더욱 늘어났다.”
위에서 17세기경 얼스터에 영국의 개신교도들이 이주를 하였다고 했다. 이들이 이주를 하게된 배경은 무엇일까? 바로 청교도 혁명의 결과에 의해 탄생한 크롬웰 정부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 정책에 의한 결과이다.(우리도 종교적인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후 많은 일본인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정착하지 않았던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기회를 획득하고자…) 바로 당시 영국도 그랬던 것이다.
5,6세기부터 그리스도교가 싹튼 얼스터 지역은 당시 로마카톨릭을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크롬웰 정부의 지원을 힘입은 신교도들은 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로마카톨릭 주민을 앞도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프랑스 신교도들인 위그노들에 의해 더욱더 성장하게 되었다.(근면 성실한 위그노들의 프랑스 탈출은 당시 프랑스 정부에는 큰 경제적 손실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종교적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이주하였던 것이다.)
이야기를 영국의 종교 분쟁으로 옮겨보자. 영국은 1534년 로마카톨릭과 결별하고 온건한 칼뱅주의를 받아들여 영국 국교회를 설립(핸리 8세)하였다. 이것이 바로 성공회이고 사실상 성공회는 개신교라 할 수 있는데 이때부터 로마카톨릭에 대한 영국 국교회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새로운 수장령과 통일령을 제정하고(1559) 신앙개조(信仰箇條)를 정비함으로써 영국 국교회를 명실공히 확립하였다.
그런데 이때 칼뱅주의에 의한 투철한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청교도였다. 이들은 서서히 세력을 키워갔다. 스튜어트 왕조(제임스1세)가 들어서면서부터 영국 국교회는 로마카톨릭은 물론 당시 무시 못할 세력으로 성장한 청교도들까지 박해하기 시작하였는데(1605) 찰스1세 때에 더욱 두드러졌다. 청교도는 왕당파와의 싸움, 청교도의 분열 등 여러 사건을 치른 후 1649년 찰스왕을 처형하고 올리버 크롬웰을 지도자로 하는 공화정부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청교도가 이끄는 공화정부가 수립되었고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17세기에 북아일랜드로의 개신교도(청교도)의 이주(오늘날 북아일랜드 분쟁의 원인)가 시작된 것이다.

 

p.520

문학으로 보는 성경

 

로버트 힌데,《신은 왜 존속하는가》